관념의 씨앗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정지인 옮김), 곰출판, 2022(2021 1쇄)
(201~208쪽)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죽는 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았다.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이나 회한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자기 노력의 결과로 칼질을 당하고 흉터와 수치만 남은 수천명에 대해서도, 자기 권력을 놓지 않으러 투쟁하는 와중에 짓밟힌 사람들 - 제인 스탠퍼드, 그에게 명예가 훼손된 의사들, 그가 해고한 스파이, 그에게 성도착자 소리를 들은 사서-에 대해서도.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인간이요- 도 무시해버린 남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숨어 있는 보잘것 없는” 것들에 몰두하고 관심을 기울이던 그 상냥했던 소년이, 어떻게 바로 그 숨어 있는 보잘것 없는 존재들을 기꺼이 말살하려는 남자가 된 것일까? 그의 이야기 중 어느 지점에서 변한 것일까? 그리고 왜?
데이비드의 정서적 해부도를 쫙 펼쳐놓고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원흉은 그 스스로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던 두툼한 ”낙천성의 방패“가 아닌가 싶다. 데이비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옳은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쓴 루서 스피어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확신과 자기기만과 단호함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 강화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자기 길을 막는 모든 걸 뭉개버릴 수 있다고 믿는 그의 능력은 자신의 길이 진보로 이어질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면서 몇 배는 더 커졌다.“ 데이비드는 공개적으로는 자기기만을 그토록 공격했지만 사적으로는, 특히 시련의 시기에는 더욱더 자기기만에 의존했던 듯하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 그 심리학자들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나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가 경로를 이탈한 지점을, 그의 방향타를 슬쩍 밀어 그가 그토록 파멸적으로 경로를 벗어나게 만든 사건 혹은 개념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의 장들을 배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지른 여행부터 팰러앨토의 에덴동산, 블루밍턴에서 있었던 화재, 뉴욕주 북부에서 보낸 소년 시절에 별이 총총했던 밤들까지 거꾸로 하나하나 훑었다. 한 해 한 해 차례로 그의 이야기들을 채로 거르고, 차곡차곡 쌓인 만남들을 유리단지 하나하나, 물고기 하나하나 내려서 살펴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나는 제비들이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페니키스 섬의 헛간에서 루이 아가시가 젊은 데이비드의 정신에 관념의 씨앗 하나를 심어놓는 순간에 다다랐다. 그것은 자연속에 사다리가 내재해 있다는 믿음이었다. 자연의 사다리, 박테리아에서 시작해 인간에까지 이르는, 객관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는 신성한 계층구조. 이 관념이 데이비드의 세계를 다시 건축했다. 그것은 꽃을 수집하던 그의 부끄러운 습관을 ”가장 높은 수준의 선교 활동“으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속 비어 있는 공간을 그가 평생 인생을 항해하면서 직업과 상과 아내와 자녀와 학장직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고 다닐, 폭발적인 목적의식으로 가득 채웠다. 그 관념은 그가 하나의 재앙을 헤쳐나가고 이어서 다음 재앙을 헤쳐나가는 연료가 되어주었다. 그는 지느러미나 두개골의 형태 속에 도덕적 안내도가 담겨 있다는 믿음을 품고서, 나침판처럼 자연을 읽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충분히 꼼꼼하게 살펴보면 누구를 모방해야 할지,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알아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마디로 깨달음으로, 평화로, 그 무엇이든 사다리의 꼭대기에 놓여 있을 열매를 향해 나아가는 진실한 경로를 알게 될 거라고.
그리고 인류가 쇠퇴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생각했을 때,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류를 구출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그는 자연의 질서에 관한 믿음을 칼날처럼 휘두르며 인류를 구원할 가장 건전한, 아니 유일한 방법은 불임화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다윈이 나타나 신의 계획이라는 관념이 허상임을 폭로했을 때, 데이비드는 지구의 피조물들이 우연히 생겨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완벽함의 계층구조에 관한 관념을 유지하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애썼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천천히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이 더 적합하고, 더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더 진화된 생명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데이비드는 왜 그걸 보지 못한 걸까? 사다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반증하는 증거들이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식물과 동물이 배열되는 방식에 관한 이 자의적인 믿음을 왜 그토록 보호하려 한 걸까? 그 믿음에 도전이 제기되면 왜 더욱 강하게 그 믿음을 고수하고 폭력적인 조치를 합리화하는 데 그 믿음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그 믿음이 그에게 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단지 페니키스 섬에서 젊은 그에게 처음으로 불꽃을 당긴 목적의식만도, 경력과 대의와 아내와 편안한 생활에 대한 보장만도 아니었다. 훨씬 더 심오한 무엇, 그것은 바다와별들과 현기증 나는 그의 인생을 휘몰아가는, 소용돌이치는 늪을 깔끔하고 빛나는 질서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었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그 계층구조를 놓아버리는 것은 삶의 회오리바람을 풀어놓는 일, 딱정벌레와 매와 박테리아와 상어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의 주변, 그의 위에서 빙빙 돌게 하는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
-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 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자서전을 덮었다. 2권이자 마지막권인 올리브색의 책. 나는 그 책을 헤더의 시카고 아파트에서 내가 머물던 작은 손님방 침실 탁자에 올려두었다. 밤공기가 차분했다. 헤더는 시내 건너편에 있는 남자친구의 집에 갔다. 비명을 지르는듯한 도시의 뜨거운 빛이 창을 뚫고 들어왔다.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분홍색 쓰레기더미로 만들어버린 하늘 저 너머에서 분명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써온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열심히 뉘우치든 어떤 피난처도 약속도 주지 않는 황량한 지구로.
나는 살면서 내 인생의 많은 좋은 것들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그 곱슬머리 남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