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운율
김혜리, 영화산문집 [묘사하는 마음], 마음산책, 2022.
일상의 운율
'패터슨'
감독, 짐 자무시, 2016
미국 뉴저지 패터슨시에 사는 노선버스 기사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의 일상은 대다수 노동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대동소이하다. 다만 그는 시를 쓴다. 패터슨은 매일 아침 6시에서 6시반 사이에 자명종 없이 일어나 잠들어 있는 사랑하는 아내 로라(골시프테 파라하니)의 어깨에 입맞추고 간밤에 미리 꺼내둔 옷을 입고 걸어서 출근한다. 차고지까지 걷는 동안 머릿속에 떠올린 시상을 차계부를 관리하는 동료가 올 때까지 운전석에서 끄적거린다. 버스를 모는 동안 귀에 흘러드는 승객들의 대화가 거리 풍경이 그의 마음에 언어로 쌓이고 점심시간이면 폭포 앞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쓴다. 퇴근해서 어쩐 일인지 매일 기울어져 있는 집 앞 우편함을 바로잡고 거실로 들어서면 로라가 하루 종일 한 일을 들려주고 당신의 시를 꼭 책으로 묶어야 한다고 재촉하며 저녁을 내준다. 요리를 포함해 로라는 항상 창의적 취미 활동으로 바쁘기 때문에 패터슨은 주로 말을 듣는 쪽이다. 어둠이 내리면 반려견 마빈과 산책을 나가 동네 바에서 맥주잔을 내려다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패터슨’은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짐 자무시가 편애하는 예술 형식인 변주의 향연이다. ‘패터슨’의 관객은 주말을 제외하면 어슷비슷한 일과를 다섯 차례 지켜본다. 그러다 토요일에 이례적 사건이 한 가지 일어나고 일요일의 패터슨은 사건의 여파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조용히 회복한다. 그리고 월요일, 다시 궤도가 시작된다. ‘패터슨’은 굳이 분석할 것도 없이 영화 자체가 7연(혹은 다음 월요일까지 8연)으로 이루어진 시다. 우선 기상, 산책, 식사 같은 정해진 일과가 기본적 압운을 이룬다. 세부적으로는 반복되며 조금씩 달라지는 숏과 인물의 행위가 크고 작은 패턴을 - 로라가 그리는 그림처럼 - 아로새긴다. 화요일 아침 꿈에서 쌍둥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패터슨에게 들려주는데, 그다음부터 여러 쌍둥이들이 잊을 만하면 패터슨의 시야에 들어온다. 마법은 아니다. 이야기가 예술가의 촉을 건드린 결과 열어젖혀진 감각이 세계에 잠재돼 있는 패턴을 예민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짐 자무시는 반복되는 노동 안에 존재하는 예술적 영감에 주목한다. 만약 소재가 시가 아니라 음악이나 영화, 아니 회화였대도 ‘패터슨’과 같은 아마추어리즘의 예찬이 가능했을까 상상해본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는데, ‘패터슨’에는 행장 가벼운 시의 상태를 동경하는 영화감독이 얼핏 보인다. ‘패터슨’의 패터슨이 통근하는 시인이라면 아내 로라는 재택 종합예술가다. 특히 로라의 열정은 페인팅에 집중된다. 방 벽부터 도시락에 넣은 귤껍질까지 그의 캔버스이니 말 다 했다. 흑백을 편애하는 로라의 과감한 화풍은, 색과 패턴이 대범한 핀란드의 디자인 브랜드 마리메코를 연상시키는가 하면 짐 자무시 감독의 흑백영화 사랑이 반영된 결과 같기도 하다. 실존 미술가 가운데 로라에게 영감을 줬을 법한 인물은 장 뒤뷔페. 아르브리의 옹호자였던 뒤뷔페는 훈련받은 프로 예술가보다 어린아이나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 등 소박한 정신이 자발적으로 잘그린 그림이 위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라가 그린 반려견 마빈의 초상 중 한 점이 윤난히 뒤뷔페 풍이다. 뒤뷔페의 이름은 영화 말미에 언급도 된다. 아마추어 예술을 예찬하는 ‘패터슨’과 어울리는 선택이다. 뉴저지 패터슨시는 수많은 미국 소도시 가운데 임의로 선택된 배경이 아니라 영화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우선 짐 자무시는 패터슨 출신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5권 길이의 서사시 [패터슨]의 도입부에서 영화를 착안했다고 밝혔다. 윌리엄스의 시에는 퍼세익강의 폭포 옆 바위에서 사람의 형상을 발견하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감독은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소아과, 산부인과 의사로서 평생 3천 명의 아기를 받고 시민들을 치료하며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윌리엄스처럼 일상과 예술을 병행하는 시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윌리엄스와 그를 잇는 뉴욕파 시인들의 이상 역시 패터슨처럼 주변의 평범한 사물에 대한 감흥을 묘사하고, 불특정 다수가 아닌 가까운 특정인에게 말을 걸듯 쓰는 시였다고 한다. 비중있는 백인 캐릭터가 주인공을 포함해 두세 명에 그치는 인물구성도, 중동계 아프리카계 인구가 미국에서도 손꼽히게 많은 패터슨시의 실제를 반영하고 있다(짐 자무시의 영화는 항상 다인종 캐릭터로 채워지는 편이긴 하다).
역사와 현실을 배제하지 않은 만큼, 영화 속 패터슨의 삶도 무풍지대일 수는 없다. 실제 패터슨시는 경기 악화로 범죄 및 사건 사고가 자주 신문 헤드라인에 오르내리는 도시가 됐다고 한다. 짐 자무시는 리얼리티를 제거하지는 않되 어디까지나 영화의 중심을 인물 내면에 두고 현실의 위험은 노이즈 수준으로 제어한다. 패터슨의 생활에도 위험이 있지만 그것들은 물새처럼 수면에 파문만 남기고 스쳐간다. 예컨대 힘합풍으로 차려입은 청년들이 밤길에 차를 세우고 개가 납치될 가능성에 대해 떠드는 장면은 긴장을 야기하지만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운전하던 버스가 고장을 일으켰을 때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다는 패터슨의 방침은 잠깐 도전받는다. 같은 날 저녁 패터슨이 매일 들르는 동네 바에서는 총을 든 청년이 소동을 일으키지만 흉기는 장난감으로 판명된다. 이때 패터슨은 반사적으로 청년을 제압하고 영웅다움을 칭찬받는데 본인이 더 당황한 기색이다. 침실에 놓여 있던 군복 입은 사진이 관객에게 상기되면서 시인의 삶에 있었던 이질적 시기를 짐작하게 만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다. ‘패터슨’은 무엇보다 현실의 잦은 바람 속에서 자기 안의 고요를 확보하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이상하고 슬픈 세상을 견디게 만드는 언어가 시를 포함한 예술이라고 믿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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