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아 2022. 12. 21. 12:34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2012

(36~39쪽)

오늘날 중국의 젊은 세대 가운데 1989년의 텐안문(天安門) 사건에 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설사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아주 모호한 반문만 던질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두시위에 나섰다면서요?”

20년이란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하지만 역사의 기억은 결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나는 1989년의 텐안문 시위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이 오늘 어떤 입장에 서 있건 간에, 어느 날 갑자기 지난 일들을 회고하게 될 때 자신의 가슴과 뼈에 깊이 새겨진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 가슴과 뼈에도 깊이 새겨진 바로 그 느낌이 나로 하여금 ‘인민’이라는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사람과 한 단어의 진정한 만남에 기회가 필요할 때도 있다. 내 말뜻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생에서 수많은 단어를 만나지만 어떤 단어들은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데 비해 어떤 단어는 평생을 함께 지내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게는 ‘인민’이 바로 이처럼 어려운 문제였다. ‘인민’은 내가 가장 먼저 인식하고 가장 먼저 쓴 단어였지만 살아가면서 연이어 망각하고 배신했던 단어다. 내 눈앞에 무수히 나타났고 내 귀에 무수히 울렸던 이 단어가 진정으로 내 마음속에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가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에 아주 깊은 밤의 경험 덕분에 마침내 이 위대한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단어를 거짓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만났다고 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어학 또는 사회학, 또는 인류학적인 의미에서의 만남이 아니다. 그건 인생의 경험 속에서 얻은 진실한 만남, 모든 이론과 정의를 제거하고 난 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만남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 ‘인민’이라는 단어가 절대로 공허한 단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피와 살을 갖춘 ‘인민’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민’의 심장이 강렬하게 요동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민’에 대한 내 견해는 텐안문 광장의 백만 인파가 보여준 대규모 시위가 아니라 5월 하순 깊은 밤의 아주 작은 경험에서 왔다. 당시의 베이징은 이미 계엄 상태였지만 학생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베이징의 주요 교통 요지들과 모든 입체교차로 및 지하철 입구를 지키면서 무장한 군인들이 텐안문 광장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베이징 동쪽 스리푸의 루쉰문학원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정오마다 모든 부위에서 삐거덕 소리가 나지만 정적 소리가 나지 않는 자전거를 타고 텐안문 광장으로 갔다가 깊은 밤이나 새벽이 되어서야 다시 문학원으로 돌아오곤 했다. 

1989년 5월 하순의 베이징은 낮에는 몹시 더웠지만 한밤중에는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다. 어느 날인가 정오에 문학원을 출발할 때 날이 너무 덥다보니 반팔 셔츠만 하나 달랑 입고 길을 나섰던 것이 기억난다. 깊은 밤이 되자 나는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고 자전거를 타고 광장을 떠나 문학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온몸으로 차가운 바람을 받아야 했다. 내 몸의 모든 부위와 망가진 자전거 부위가 함께 떨고 있었다. 내가 가로등이 꺼진 거리를 달릴 때면 달빛이 대신 길을 인도해주었다. 앞으로 달려나갈수록 추위는 더해만 갔다. 내가 후자러우 근처에 점점 다가가고 있을 때쯤 갑자기 뜨거운 물결이 어둠 속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계속 앞으로 나아갈수록 이 뜨거운 열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어서 아주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아주 멀리서 수많은 등불이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뜨거운 물결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후자러우 입체교차로가 등불 빛으로 환해졌다. 다리 위는 물론 다리 아래까지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그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슴 가득 격정을 품은 채 밤하늘 아래서 소리 높여 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세우자! 중화민족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가 찾아왔을 때, 억압받는 모든 사람이 마지막 함성을 외친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의 하나같은 마음으로 적군의 포화를 용감히 뚫고 전진하자…”

그들은 손에 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신념만은 대단히 확고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와 살이 움직이면 군대와 탱크도 막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들이 한데 뭉쳐 있으니 거센 열기가 솟아올랐다. 모든 사람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 같았다. 

이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빛이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고, 또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의 몸보다 에너지를 더 멀리 전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이던 그 밤에 나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