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아 2022. 12. 30. 21:09

정옥자, [오늘이 역사다], 현암사, 2004.

(4~7쪽)
머리말

교수로서 전공논문 외에 쓰는 글을 통틀어 흔히 잡문이라 부른다.

처음 교수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여자라는 희소가치와 역사라는 전공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잡문을 부탁해 왔다. 하지만 그때는 잡문을 쓸 수 없었고 쓰지도 않았다. 내 학문이 아직 익지 않아서 담아 낼 내용이 시원찮은데다, 신변잡기나 감성에 기댄 글은 역사학자에게는 어울리지도 않으며 자칫 잘못하면 정체성마저 훼손하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전통시대에는 학문 내용과 그 표현 매체인 문장을 ‘도기론道器論‘으로 이해하였다. 사상이나 철학, 메시지를 도道라 한다면 그것을 담아 내는 그릇器으로 문장의 의의를 인정한 것이다. 도는 문장이 있어야 표현되고 문장은 도를 표현하며 빛나 둘은 보완의 관계로 파악되었다. 도기론은 역사나 철학 등 인문학에서 특히 유효하였지만 오늘날 여러 학문에도 적용할 수 있는 논리 틀이다. 전공논문이 내용을 전달하는 최소한의 수사에 그쳐 문학적 아름다움에서 볼 때 인색하다 못해 졸렬한 경우까지 있다면, 문학의 글쓰기는 포장만 화려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논문이 도에만 치우쳐 쉽고 재미있게 쓰지는 못할망정 최소한의 윤문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면, 문학은 그릇에만 치우쳐 문장 자체만 꾸미다보니 빈 수레가 요란한 꼴이다. 이러한 경향은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쳐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여 그야말로 도기론에 근접한 중정한 글쓰기의 기회가 잡문 쓰기가 아닌가 싶다. 연구 업적을 교과서에 싣고 개설서에 반영하는 데 10여 년씩 걸리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진다. 이 두터운 벽을 뛰어 넘어 바로 일반 독자와 대화활 수 있는 길이 잡문 쓰기이다. 학계의 흐름이나 새로운 지식 체계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도 잡문 쓰기로 가능하다. 더구나 역사, 철학 등을 연구하는 교수는 지식을 전달하는 일 말고도 그 사회의 방향성을 제고하고 정당한 비판 의식과 올바른 가치관을 선도할 책무가 있다.

실제 잡문을 쓰다 보면 학문 연마로 축적된 내용을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작업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과 맞닥뜨린다. 글에 담을 내용인 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표현 수단인 문장학으로서의 기에 대한 기본 능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이 천착한 학문을 얼마나 자기화했느냐 하는 데 있다. 남의 지식을 차용하고 정리하는 차원으로 참다운 글을 쓸 수는 없다. 학문을 체득하여 이해하는 수준에서 그 원리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때 비로소 학문의 체體가 서고 사물의 이치가 분명히 보이는 관觀이 서서 어떤 사안이든 자신의 관에 비춰 일가견을 피력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교수의 잡문 쓰기는 역시 여기餘技이다. 연구와 강의를 우선하고 제자들 논문 지도를 게을리하지 않는 선에서 할 일이지 글쓰기에 매달려 본말을 전도시켜서는 곤란하다. 잡문을 위한 잡문, 이름을 얻기 위한 글쓰기는 글 공해가 되어 자신은 물론 사회에까지 해악을 끼칠 것이다. 사회 봉사라는 명징한 자기 성찰이 우선해야 하리라.

그래서 선인들은 잡문 쓰기를 ’쓰고 남은 먹물‘, 여적 이라 했던가? 공부하다 보면 똑똑 떨어지는 여적 같은 사색의 편린이나 번뜩이는 예지, 국가와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의 조망과 비판의식 등은 난해한 논문의 기능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때에 따라서 전공논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교수의 잡문 쓰기는 시비의 문제라기보다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못 쓰는 것과 안 쓰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논리적이며 내용까지 알차면서도 문학적 향기까지 풍기는 글, 나아가서 서권기 나 문자향 까지 우러나는 잡문을 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이런 바람은 그리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일정한 기준을 적용하여 아껴 써왔다고 생각하였는데, 어느새 서안書案에는 하나의 책으로 묶어주기를 바랄 만큼 글이 쌓였다. 여러 곳에서 청탁 받아 여러 형태로 씌여진 그들이지만 일관된 주제는 오늘의 문제를 역사의 창을 통하여 비춰 보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이다. 법고창신은 18세기 선각자 박지원이 설파한 말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한다는 의미이니, 온고이지신을 몰라서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온고이지신이 옛것을 알아야 새로운 것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는 의미라면 법고창신은 나아가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창조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는 의도가 감지된다.

필자가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 연구의 목적은 물론 일상에서 맞닥뜨린 모든 사연과 사람들의 얼굴도 결국 법고창신의 길이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여기 모인 글 역시 결국 법고창신이라는 역사의 바다로 모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글이 우리 역사를 비추어 보고 내일의 문제를 푸는 열쇠를 찾아낼 수 있는 자그마한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일정한 기준 없이 어지러운 이 시대에 하나의 방향타를 제시한다는 의미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