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들판
모옌, [모옌 중단편선](심규호, 유소영 옮김), 세계문학전집 345, 민음사, 2016.
(13~ 16쪽)
해바라기 만발한 들판이 문득 아주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대지에 떠 있는 구름 같았다. 노랗고 부드럽고 코를 자극하는 향기가 나를 강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등에 짊어진 설탕 한 포대와 손에 든 술 한 상자까지 모두 내팽개치고 재빨리 달려갔다. 초조하게 달려가는 사이에 잊지 못하고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지난 일이 생각났다. 재작년 여름 방학 때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백구 한 마리에 이끌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작은 고모 놘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탄생했다. 나는 그 일을 내 나름대로 형태를 바꾸어 [백구와 그네]란 소설을 썼다. 나는 지금도 그 소설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매번 귀향할 때마다 나는 고향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면서 과거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번잡하고 다양한 시골 생활은 마치 엄청난 분량의 대작과 같아 그것을 끝까지 읽고 완전히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나 역시 문인들의 무료함과 천박함을 생각하곤 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신기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버드나무에 걸려 있던 쪽지의 계시는, 대학 출신의 문인의 입에 발린 말을 빌리면 “더욱 치열하고, 더욱 잔혹한“ 일인지도 모른다. 해바라기, 노란 해바라기가 만발한 들판을 숄로호프와 악시니야가 밀회하던 곳이자 사람을 얼뜨게 하는 따뜻하고 운치 가득한 낙원이다. 들판으로 달려가 그 앞에 선 나는 숨을 내쉴 수 없었다. 삭삭, 따뜻한 서풍에 흔들리는 거친 해바라기 잎사귀 소리, 방울벌레, 귀뚜라미, 여치의 밝고도 처량한 울음소리 사이로 이후 나를 한없이 번거롭게 할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해바라기 들판의 주선율로, 마치 눈썹이 불에 타 들어가는 듯 다급하고 긴장감이 넘쳤다.
나는 이제껏 들판 가득한 해바라기를 본 적이 없었다. 주로 울담 가장자리나 담벼락에 성기게 심어져 있는 해바라기만 보았을 뿐인데, 홀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사람을 능욕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들판 가득한 해바라기는 따뜻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서로서로 기대어 서 있었다. 마치 사랑이 넘실거리는 따뜻한 바다 같았다. 고향에서 이전만 해도 드문드문 심던 해바라기를 지금은 아예 들판 가득 넘실대도록 심게 된 것은 농촌의 경제생활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었다. 아름다운 해바라기 들판에 내버려진 여자아이가 수많은 모순을 한 몸에 안은 존재로,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리지 않을 수도 없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깨닫게 되었다. 인류는 지금까지 진화해 왔지만 사실 짐승의 세계와 겨우 백지장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또한 인성이라 사실 한번 쿡 찌르면 그대로 찢어지는 얇고 힘없는 백지장 한 장이나 다를 바 없다.
해바라기 줄기는 굵고 회녹색인데, 줄기 아래 반 정도는 잎이 달리지 않은 채 어렴풋이 잎이 붙어 었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잎이 무성해져 햇빛이 비쳐 들지 않았다. 잎은 거무죽죽한 초록빛으로 광택이 나지 않았다. 휘어진 목덜미에 매달린 사발만 한 수많은 꽃받침의 모습이 마치 공손하게 조아린 고개 같았다. 나는 소리를 따라 해바라기 들판으로 들어갔다. 금 같은 화분이 비 오듯 떨어지는 가운데 내 머리카락과 손등에, 내 눈 속에, 쏟아지는 빗줄기에 숫돌처럼 보이는 땅 위에, 아기를 감싼 빨간 비단 위에, 아이 옆 보탑처럼 생긴 개미굴 옆에도 떨어져 내렸다. 까만 개미들이 북적대며 자신들의 모루를 쌓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득 절망적인 느낌이 내 뼛속까지 전해졌다. 개미들의 수고로운 노동은 인간에게 기상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는 것 이외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높고 크게 개미집을 지은들 빗줄기가 거세게 퍼붓는다면 아마 삼십 초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거대한 우주에서 인류의 위치 또한 이렇듯 개미와 비교해 볼 때 과연 얼마나 높고 크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공포와 함정의 사기와 거짓, 속고 속이는 일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해바라기 만발한 들판에조차 붉은 아기가 숨겨져 있다. 나는 아기를 내버려 둔 채 내 길을 가야겠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치 아이가 내 팔에 용접이라도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내버려 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팔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무 아래로 돌아와 다시 쪽지에 적힌 글자를 곰곰이 살펴봤다. 글자들이 사납게 나를 노려봤다. 들판은 여전히 공활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가을 매미들이 버드나무에서 애달프게 울고 있었으며, 현성으로 통하는 구불구불한 길에 눈부신 황금빛이 번져 있었다. 피부병에 걸린, 집에서 쫓겨난 들고양이 한 마리가 옥수수 들판에서 빠져나와 나를 보고 야옹 하고 울더니 느릿한 걸음걸이로 깨밭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자아이의 통통하고 투명한 입술에 잠시 시선을 준 후, 등짐을 메고 상자를 들고 아이를 받쳐 안은 채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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