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코 벽화처럼 나는 서서히 지워질 것이다
아니 에르노, [탐닉](조용희 옮김), 문학동네, 2004.
(226~232쪽)
9월7일 목요일
피렌체. 나는 왜 피렌체에 다시 오고 싶었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도시는 베네치아에 비길 수 없다. 그리고 로마에서와 같은 추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유일한 것이라고는 열여덟 해 동안의 결혼생활 후 남편과 헤어져, 원하던 자유를 쟁취하고 1982년 이곳으로 여행을 왔다는 기억.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열정의 추억들을 남겨놓고 이제 곧 프랑스를 떠나려는 한 남자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늘밤에도 나는 기차 안에서 끊임없이 지난 월요일의 장면들을, 그리고 내가 앞으로 준비하고 있는 장면들을 떠올렸다.
호텔은 아르노 강가에 있는데 끔찍하게 시끄럽다. 1963년 로마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내가 여기 뭘 하러 왔나?“
오늘 아침, 우피치 박물관. 보티첼리의 ‘봄’을 다시 봤다. 흥미가 가지 않는 산로렌초 성당.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났다는 비디아 수도원. 건물이 멋진 바르젤로 미술관. 미술관 아마당은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만족감을 준다. 그리고 관능적이고 대담하며 강렬한 이 조각상은 생의 찬미가다. 러시아 예술은 너무 정신적이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리부아르 카페에서 코코아를 마신다. 멋진 이탈리아 여자들, 그리고 일본 단체 관광객들(그들은 언제나 나를 짜증나게 한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 산토 스피리토 성당으로 갔더니 문이 닫혀 있다. 산토 스피리토 광장에서 느낀 적막감. 느긋한 히피족 하나가 분수 가장자리 내 옆에 앉는다. 1963년과 똑같은 절망감. 오! 마흔아홉 살이나 먹었는데 나를 좀 가만 내버려뒀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이번 주가 길것, 아주 길 것이라는 느낌. 오후, 파치 가 예배당과 치마부에의 예수를 빼고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산타크로체 성당에 갔다. 조토의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 사람들이 같이 온 사람들 모두 들으라고 큰 소리로 안내 책자를 읽는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알고 있던 것을 모두 ‘확인’할 뿐 진정으로 즐기지 못한다. 하지만 뭐랄까.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안정감을 준다. 영원이거나 영원에 가까운 무엇, 그리고 인류. 산타크로체 성당에 있는 무덤들의 뛰어난 스타일과 감동적인 형상.
9월8일 금요일 오늘 아침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에 들어서니 마침 찬송가와 양초들로 가득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서야 오늘이 9월8일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이라는 생각이 났다. 옛날에는 나도 미사에 참석하여 영성체를 모셨다. 1953년의 추억. 아침 미사를 드렸는데, 날씨가 너무 좋고 더운 날이었다. 사촌인 콜레트와 나는 오후에 시셀 살랑테와 약속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열세 살이나 위였지만 콜레트와 아무 부끄럼 없이 공유했던 나의 열정적인 첫사랑이었다. 지금은 S가 나보다 열세 살 적다. 1953년에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간파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열정. 인간에 대해서. 특히 남자. 그래, 미술관에서도 나를 황홀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육체. 매우 강해 보이는 아름다운 손은 다비드의 순수한 힘을 보여준다. 각각의 근육, 관절, 엉덩이 윗부분의 돌출부.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천재적인 조각가에 의해 신격화된 남자의 육체를 찬미하게 한다. 여자들은 남자의 육체가 추하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천지창조를 주제로 한 태피스트리. 이브의 과오, 죄, 하지만 죄같지도 않은 죄. 아주 자연스런 것이다. 15세기의 그림들. 간헐적으로 피가 솟구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 바로크 스타일의 장면들. 1982년에 이미 본 산 마르코와 프라 안젤리코 수도원을 돌아보다 경내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2시까지 머물러 있었다. 숨막힐 듯한 이 장소에서 짓누르는 동시에 짓눌리는 돔 지붕. 내부는 실망스럽다. 전에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잊고 있었다. 레부블리카 광장의 도니니 식당에서 샌드위치와 카마린드 열매를 샀다. 어두운 트리니타 성당. 그보다 더 어둡고 기이한 오르산미켈레 성당.
날씨가 흐리면서 추워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바디아 수도원을 돌아보기로 결정하고, 세번째로 그 문턱을 넘는다. 캄캄하고 좁은 계단을 통해 정면 회랑에 도착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기이한 프레스코 벽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 장면이었는데, 줄에는 행주가 걸려 있었고, 상자 같은 것 위에 흉하게 생긴 개가 앉아 있다. 이내 나는 혼자가 되었다. 침묵. 수도원 한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 언젠가 다시 올 때도 이 나무가 남아 있을까? 감동으로 떨리는 순간. 가장 행복하고 충만할 수 있는 고독의 시간. 내가 이 장소에서 기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그들을 보니 좀전의 나의 고독이 신비하고 예외적이고 특별한 행운처럼 느껴졌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물기로 반짝거리는 거리가 보인다.
9월9일 토요일
해와 바람이 번갈아 나타나는, 조금 춥게 느껴지는 날씨. 특별한 계시도 없고 아련한 슬픔마저 가슴속을 떠돈다. 이탈리아에서의 주말은 언제나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아침에 본 카시 부오나로티는 별로였다. 암브로조의 예쁜 시장과 암브로조 성당을 둘러보다 골동품 시장에 갔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 여기서 무엇을 살까? 옛날, 특히 7년 전처럼 이것저것 사고 싶은 의욕이 더는 없다. 자동차들이 가득 차 있는 광장을 힘겹게 걸어서 도착해보니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문은 닫혀 있다. 레푸블리카 광장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신다. 거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춥다. 돔 광장와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면 예술가의 죽음이 확실하게 보인다. 범인류적인 이상의 성취를 묘사한 아름다운 작품들.(14세기?) 아담의 몸 한가운데쯤, 갈비뼈에서 나오는 이브의 탄생을 보여주는 혐오스런 장면. 메디치 가의 궁전은 볼 필요가 없었다. 마침내 문을 연 사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화려한 내부를 보다. 내가 좋아하는 교회 스타일(그에 비하면 두우모는 빈 보석 상자 같다). 마사초의 ‘삼위일체’ 벽화를 보며 열심히 성령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 아름다운 미켈란젤로의 작품들로 장식한 무덤이 있는 메디치 궁전 예배당을 잊었다. 희미한 얼굴의 낮과 밤 그리고 새벽과 석양. 이번에야말로 미켈란젤로의 힘과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었을텐데. 피렌체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기로 한 것이 오늘 저녁에는 후회스럽다. 방도 작고, 옆방에 든 사람들도 끔찍하다(지독한 여자 목소리, 내 어머니 목소리보다 더 지독하다. 적어도 어머니는 밖에 나오면 조심했다). 옛날에 저녁이면 혼자 대학 구내식당에 가기가 망설여졌는데, 오늘 혼자 식당에 가려니 그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9월10일 일요일
피렌체 지방 특유의 화창한 일요일. 다른 날보다 객관적으로 더 유쾌하다. 하지만 나의 이탈리아 여행 -베네치아는 제외-을 이제 끝내야 할 것 같다. 1982~1989년. 7년간. 1963년 7월14일 로마에서 느낀 우수가 다시 밀려온다. 사실 내일이면 S를 본지 1주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가 “당신은 멋져”라고 말한 지 1주일. 다른 때보다도 그가 훨씬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그가 프랑스를 떠나고 나면, 어떻게 느껴질까 상상이 간다. 파리와 모스크바 간 기차를 탄 이틀 동안 나는 서서히 지워질 것이다. 땅과 하늘을 표현한 산타마리아 노벨라 교회당 벽의 프레스코 벽화처럼.
도시의 거리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소음은 언제나 슬픔을 자아낸다. 3시다. 분명 너무 불행해할 것을 알면서도 방으로 돌아왔다. 외국의 호텔 방. 오후, 고독…. 오늘 아침 산토 스피리토 성당에서 미사가 있었다. 성당 광장에는 관광객들이 거의 없었고, 시장이 섰다. 어둡고 조그만 산펠리체 성당, 피티 궁, 팔라틴 갤러리와 현대미술관. 볼거리가 거의 없었다. (19세기의 전형적이고도 평범한 그림들). 그리고 보볼리 공원, 실편백나무 가로수길, 아마도 카페 이름이 독일식이라 독일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었을 카페하우스. 둥뚱하고 촌스러운 커플이 내 테이블에 앉았다. 여자 혼자 있으니 같이 앉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원형극장. S가 사진을 찍었다고 한 거대한 몸집의 난쟁이가 있는 부온타렌티 동굴. 그도 겨우 3주 전에 우피치 박물관, 피티 궁, 돔을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다. 이 공원들은 혼자 산책하기엔 너무 힘든 곳이다. 모든 것이 나를 사랑으로 초대하는 듯싶다. 지난 10월 소공원에 대한 추억, 그리고 레인그라드 여름궁전의 정원. 때때로, 행복하든 불행하든 S를 다시 만날 것이고, 우리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는다. 어디에 근거를 둔 확신인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