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인생의 의미

이춘아 2023. 1. 10. 23:26

박노자, [비굴의 시대], 한겨레출판, 2014. 

(371~375)
에필로그: 인생의 의미

인생에 그 어떤 고유한 의미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지구와 함께 멸망하고 말 인류 전체에게도 그렇고, 개인 역시 그러하다. 결국 죽음의 불가피성을 실감하면서 인생의 유한성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제각기 부여하게 된다. 그런 의미 부여 과정에서 바로 ‘개인’이 성립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개인이라기보다는 타자들 속에 이끌려 흘러가는 하나의 무력한 개체일 것이다. 타자들과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눌 줄 아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자들을 그저 따르는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이는 온전한 의미의 개인은 아닐 것이다. 개인은 심성적인 자립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어린 시절에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으면서도 인생의 의미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그때 고민의 주된 화두를 제공한 것은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였다. 이 작품은 소련은 물론 북한과 베트남 같은 공산권 여러 나라에서 수신의 기본으로 통했다. 1942년 중국어로 번역되었고, 그 뒤 중국과 한국에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문학의 모범작으로 통하기도 했다. 소설의 주인공 파웰 코르차긴은 병환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투쟁하기로 결심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한 번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나중에 과거의 허송세월을 후회하지 않도록, 비겁하고 좀스러운 과거에 대한 수치심이 마음을 불태우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죽으면서 ‘내 모든 생명과 정력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인류 해방 투쟁에 바쳤다’고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적어도 3~4세대의 중국인, 북한인, 베트남인, 소련인, 동독인 등은 이 구절을 화두 삼아 참고하며 인생의 의미를 고민했다. 생명은 한 번 부여받는 것인지, 윤회의 과정에 따라 여러 번 부여받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한 개체인 내가 그러한 우주의 원리까지 알 수는 없다. 우주 앞에서 개미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조금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파웰 코르차긴처럼 인류 해방 투쟁에 합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각자 능력이든 정치 성향이든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 해방 투쟁을 잘 모르는 보수주의자라도,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모두 ‘인생의 의미’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혁명 투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의무나 필요도 없다. 모두 수행자가 되어서 계율과 참선의 대장경 공부를 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진보든, 보수든, 어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딱 한 가지 ‘인간으로서의 본원적 의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이 세상에 ‘남’이라는 것은 없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일부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군중 동물이다.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으며, 타자와 소통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도 없다. 인간의 특징이라면 언어 구사 능력이다. 언어는 철저히 사회적이며, 인간을 나누고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촘스키 같은 여러 언어학자가 증명했듯 결국 모든 언어의 심층적 문법은 같은 원형에 의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못 배울 언어라고는 없다. 언어는 경계선을 긋은 동시에 그 경계선을 초월하게도 한다. 

남이라는 것이 없듯이 남의 아픔이라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남의 아픔도 자기의 아픔으로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인간에게는 자비심 같은 것이 생기고, 그 마음이 깨어나면 각자 자기 나름대로 중생 구원의 길을 갈 것이다. 그것이 파웰 코르차긴이 말한 것과 같은 혁명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거시적 의미의 혁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나 개인의 고통을 생산하고 강요하는 체제에 맞서는 것도 벌써 혁명적 행위에 준한다. 약자는 툭 하면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반면 관리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잘 듣는 사람을 길러내는 군대에 입대하기를 거부하는 것, 착취 체제에서 상위를 점하는 대학에 입학하겠다는 욕망을 버리고 입시 공부와 관련한 주변의 강요를 거부하는 것, 대학의 기업화에 맞서 자진 퇴학하는 것,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행동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굳이 엄청난 압력을 감수해야 하는 행동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순히 남들을 자신만큼 챙기면서 사는 것도 이 각자도생의 시대에는 ’작은 반란‘이다. 그러한 작은 반란이 모여 결국 하나의 큰 불이 지펴질 것이다. 

각자도생의 시대에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란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수백만 년 동안 군중 동물로 살아온 인간이 남을 짓밟고서 혼자서만 누리는 생존과 번영에 진정 행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아무리 표면적으로는 성공해도 이 체제와 시대가 각자에게 남기는 것은 내면의 파멸과 고통일 뿐이다. 

인간이면 남의 고통을 진지하게 보고 이해하는 순간 자비심을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운명이 그 자비심을 실천한 기회를 줄 것이다. 각자도생 시대의 적자생존이니 약자 도태니 하는 코드에 역류할 수 있는 심층적 집단 심성이란 결국 자비심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혁명적 실천의 원천이다. 파웰 코르차긴의 말대로 “내 모든 생명과 정력”을 다해 그것을 실천한다면 죽는 순간에는 그래도 덜 부끄럽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