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전영애,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문학동네, 2021.
(13~17쪽)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괴테가 60년을 쓴 그 작품, [파우스트] 전체를 한 줄로 요약하라면 누구든 서슴없이 택하는 구절입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번역되어온 문장이지요. 그러나 이 번역은 ‘노력’에 너무 치우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노력한다’는 말에는 땀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여러 해를, 아니 수십 년을 두고 고민했지만 괴테가 말하고자 한 원래의 뜻이 그런 ‘노력’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굳어진 번역을 부러 바꾸었습니다.
‘노력’은 번역의 원류인 아시아적, 특히 일본적 정서에 맞겠고, 우리의 정서에도 맞겠지만 특히 일본에서 1911년에 처음 번역된, 지금도 정본으로 읽히는 모리 오가이의 전설적인 번역본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지식인들도 그걸 읽었고, 그 전통이 상당 부분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난의 시대의 우리 정서에, 1911년 일본의 정서에는 더더욱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이 번역은 [파우스트]의 본래적 진의에서는 조금 벗어납니다. 독일어 동사 ‘streben’이 불철주야, 일로매진 같은 뜻도 없지 않으나 못지않게 마음속의 솟구침을 담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이 빛을 향하듯, 탑이 하늘로 치솟듯이요. 어찌되었던, [파우스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이렇습니다. 그러면 그 요약문만 읽으면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어떤 법칙을 찾아내어 정리로 귀납시키는 논리적 사유나 과학의 공식의 문장을 복숭아의 씨에 비유한다면, 문학작품이란 달고 신 온갖 맛이 배어 있는 과육과도 같은 것입니다. 시간을 들여 꼼꼼히 읽어내지 않는다면, 그 다채로운 맛을 절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이 핵심 문장이 나오는 곳은 [파우스트]의 첫머리 ’천상의 서곡’ 부분입니다. 대여섯 쪽 남짓한 이 부분이 책 전체 작품의 주제적 핵심을 담은 개요라 할 막이지요.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책을 펼치면 바로 ‘헌사’와 ‘본무대 앞의 서연’이 있고, 그다음 작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바로 전에 ‘천상의 서곡’이 나옵니다. 한 편의 시인 ’헌사‘는, 벌써 중년이 된 괴테가 친구 쉴러의 간곡한 당부 덕에 생애 세번째로 집중해서 [파우스트] 집필에 매달렸던 시기에, 젊은 날 [파우스트]를 쓰던 때를 돌아보며 느껴지는 소회를 담은 인트로입니다. ’본무대 앞의 서연‘은 본 작품과의 연결이 아주 크지는 않은 막간극 같은 성격으로 시인, 극단주, 광대가 나누는 연극에 대한 담화입니다. 시인은 불멸의 작품을 쓰고 싶은데, 극단주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작품을 요구하며 서로 다툽니다. 그러다 공연이 안 되면 굶어야 하는 광대가 중재하는 내용인데, ’불멸과 돈’ 사이에서 줄타기를 벌이는 연극/문학/예술의 영원한 문제들이 유쾌하게 다루어지며 [파우스트]가 지옥-지상-천상을 아우르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천상의 서곡’에서 천사들은 우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만(쓰인 것이 까마득한 오래전인데, 우주선을 타고 바라보이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시각입니다!), 튀어나온 악마 메피스토텔레스는 온갖 “거름더미에 코를 처박고” 천상의 빛인 이성을 “짐슴보다 더 짐슴 같은” 데나 쓰는 인간의 가엾은 꼴을 한없이 비아냥거립니다. 듣다 못한 주님이 “너 파우스트를 아느냐?”라고 물으시니 메피스토텔레스는 “아 그 박사요?!” 하고 냉큼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런 메피스토텔레스에게 주님은 “내 종이니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좀더 부연하시는 말씀이 바로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해보라 하시며 메피스토의손에 파우스트를 맡깁니다. 이로써 방황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구원되는, 그런 큰 그림이 주제로서 제시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주문이나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설명문이나 잘 살펴보면 둘 다 비문입니다. 지향이 있다는 것을 갈 곳이 있고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가 있는 한 방황한다니, 갈 곳이 있기에 길을 잃는다니, 그러나 이 비문의 함의가 참 큽니다. 뒤집어보면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곧 갈 곳이, 목표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방황이 바로, 목표가 있고 지향이 있기 때문이라니! 참으로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방황해도 괜찮아. 다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언젠가 어디인가에 닿아, 그런 쉬운 말보다, 말이 될 듯 말 듯한 이 위로가 주는 여운이 큽니다. 참으로 정교한 비문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 부연의 문장에서는 비문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저 나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선함이 있을 수 있고,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어도 그 선의 알맹이가 있기에 그에게는 바른 길의 의식도 선연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해하라, 용서하자가 아닙니다. 이 비문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참으로 큰 포용의 메시지입니다. 이 얼마나 잊히지 않는 커다란 껴안음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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