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의 대작
석영중, [매핑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2021(2019 초판)
(391~ 395쪽)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대문호의 예술적 역량이 총집결된 대작이다. 이 한 편의 소설에 소설가이자 사상가이자 종교 철학자로서의 도스토옙스키가 쓰고자 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소설에서 그의 모든 작가적 역량, 그의 모든 인생 경험, 그의 모든 신학적 사상적 깊이, 그리고 그가 이전에 썼던 모든 소설들이 하나의 서사로 통일된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저자의 인생에서 마지막 3년 동안 쓰였지만 여기 담긴 시간은 저자의 생애 전체다. 쓰인 장소와 배경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셋집과 스타라야 루사지만, 소설은 그때까지 저자가 밟았던 모든 땅을 섭렵한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대문호의 인생 지도와 작품의 지형도를 요약해 주는 또 하나의 ‘종합 지도’ ‘매핑 속의 매핑’인 셈이다. 이 소설에 관한 설명을 별도로 묶어서 정리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방탕하고 교활한 홀아비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두 번의 결혼으로 세 아들을 얻었다. 55세인 그는 아들들의 양육은 전적으로 남의 손에 맡겨 놓고 주색잡기를 일삼으며 살았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는 ‘과격하고 색욕이 강하고 인내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난봉꾼’으로 성장했다. 둘째 아들 이반은 ‘자부심이 강하고 신중한 ’과학도로 얼마 전에 대학을 졸업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지독하게 혐오한다. ‘저따위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걸까!’
심성이 고운 셋째 아들 알료샤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인근 수도원의 덕망 높은 장로 밑으로 들어가 수도사의 길을 밟고 있다. 집 안에는 표도르가 동네 백치 여자와 장난삼아 관계를 맺어 얻은 서자 스메르자코프가 하인이자 요리사로 함께 살고 있다. 늙은 하인 그리고리 부부의 손에서 자라난 스메르자코프는 아버지와 형제들은 물론 세상 전체를 증오한다.
어느 날 아버지의 집에 세 형제가 다 모이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드미트리는 동네 늙은 상인의 첩인 그루셴카를 한 번 보고는 넑이 나가 약혼녀인 양갓집 아가시 카테리나를 버린다. ‘벼락을 맞은 끝에 몹쓸 병이 들어 지금까지 앓고 있는거지’ 아버지 표도르 또한 그루셴카에게 반해서 ‘밤에 혼자 찾아오면 주겠다’며 봉투에 3천 루블을 넣어 기다리고 있다. 한편,이반은 드미트리의 심부름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형의 약혼녀 카테리나를 남모르게 연모한다.
드미트리는 그루셴카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절실하게 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죽은 모친의 유산을 내놓으라며 아버지를 닦달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인색한 아버지가 연적인 아들에게 돈을 줄 리가 없다. ‘한 푼도 줄 수 없어. 그놈을 바퀴벌레처럼 짓뭉개버릴 테다.’ 드리트리는 아버지를 두들겨 패고 협박한다. ‘조심해, 영감. 다음번에는 죽이러 오겠어.’ ‘아버지한테 가서 머리통을 부수고 그자의 베개 밑에 숨겨 놓은 돈을 가져오겠어.’ 그런데 얼마 후 아버지가 진짜로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하고, 그루셴카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3천 루블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원숙기 대문호는 도대체 이런 콩가루 집안 스토리를 가지고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일까? 아니, 왜 이런 싸구려 소설에 헤세와 카뮈에서부터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카를 바르트,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에 이르는 세계의 문호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도스토옙스키는 막장 드라마 같은 소설에서 선과 악, 그리스도교와 휴머니즘, 전체주의와 자유, 정의와 심판, 사랑과 용서의 의미를 탐구한다. 끝없이 통속적인 소재와 끝없이 심오한 주제가 끊임없이 마주쳤다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뒤얽히면서 가정 소설, 연애 소설, 심리 소설, 정치 소설, 종교 소설, 추리 소설이 다 햡쳐진 방대한 ‘종합 소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산만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한 가지 든든한 ’실‘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람과 사건과 사상을 촘촘하게 꿰매 주기 때문이다. 대하소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짜임새를 유지시켜 주는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의 테마다.
도스토옙스키가 활동하던 시기 러시아는 농노 해방, 사법개혁, 서구 자본주의의 유입, 급진적 사회사상의 확산 등 문자 그대로 격량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른바 대변혁의 쓰나미 앞에서 수많은 가정이 붕괴되어 갔다. 가정은 가장 불행한 변화의 희생자이자 가장 심각한 사회악의 진원지였다. 도스토옙스키는 당대 러시아가 겪고 있는 변화를 가족이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고 동시에 가족의 해체와 붕괴를 망원경 삼아 거리사의 미래를 내다보았다.
대문호가 진단한 당대 사회의 질병은 패륜 중의 패륜인 존속 살해로 소설화되었다. 패륜 가정은 패륜 사회의 거울이다. 가정은 ‘사랑의 실질적인 원천’이며 ‘중단 없는 사랑의 노고를 통해 창조된다’. 사랑의 노고가 부재할 때 가정은 증오의 소굴이 된다. ‘아버지는 자식의 적이 되고 자식은 아버지의 적이 된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자 관계에 생긴 틈은 인간의 실존과 역사에 생기는 모든 균열의 원형이다. 이 틈이 메워지지 않을 때 파열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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