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작품 [파우스트]에 대하여

이춘아 2023. 2. 3. 18:07

괴테, [파우스트 1](전영애 옮김), 도서출판 길, 2023(2019년 초판).

(14~18쪽)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괴테가 60년을 두고 쓴 작품. 그 추동력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누구든 서슴없이 택하고, 누구도 이의가 없는 구절이다. 지금껏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번역되어 온 문장인데 “노력”에 다소 지나치게 비중을 두고 있어, 오랜 생각 끝에 굳어진 번역을 바꾸었다. 독일어 동사 streben이 불철주야, 일로매진 같은 의미보다는 마음속의 솟구침을 더 많이 담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번역이 어찌 되었건, [파우스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그렇다. 그러면 요약문만 읽으면 되는가. 그건 물론 아니다. 문학작품은, 어떤 법칙을 찾아 내어 정리로 귀납하는 논리적 사유나 과학적 논리와는 다르다. 후자를 복숭아의 씨에 비유한다면, 문학의 문장이란, 달고 신 온갖 맛이 배어 있는 과육같은 것일 게다. 

“내 작품은 한 집단적 존재의 작품인데, 괴테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파우스트]의 최종 교정을 마치고 나서, 그러니까 죽음(1832년 3월 22일)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인 1832년 2월 18일에 왕세자의 교육자였던 프랑스인 소레(F.J. Soret)와 나눈 대화에서 괴테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파우스트]는 그만큼 필생의 역작이고, 또한 “집단적 존재”라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괴테라는 전인적 인물도 크고, 작품의 규모도 방대하다. 예컨대 단테의 [신곡]이 유럽의 기독교적 중세의 세계관을 집약한 작품이라면, [파우스트]는 고대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중세를 거쳐(성서가 배어들어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3,000여 년“의 유럽 남북방을 다 아우르는 작품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와 기독교적 중세가 아우러지고,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많이 조명되어 있으며(예컨대 지폐 발행, 인조인간의 제작 등등), 그러면서도 중세적 혹은 탈시간적 ’구원‘의 문제도 비중있게 포섭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침 없는 욕망에 추동되는 근현대적 인간의 삶의 핵심과 문제들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어, 현대에 와서 그 시사성이 오히려 점점 커지고 있다. 많은 지식을 가졌건만 독배를 들 만큼 회의가 가득한 한 인간이 결국 악마에게 몸을 맡기지만,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다 가지려는 욕망이 끝이 없는 ”근대적인“ 한 인간이 무엇을 섭렵할 수 있으며 그 끝이 어떠한가. 그것이 작품의 문제의식이다. 이런 식으로 [파우스트]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인간의 생애가, 인간이 그려진다. 그 범례로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택했다. 이 소재는 괴테가 어린 시절에 인형극으로도 또 커서는 영국의 말로(Christopher Marlowe)가 작품화해서 영국 유랑극단이 독일을 돌아다니며 공연도 했던 것이다. 파우스트라는 욕심 많은 인간이 있었는데 악마와 계약하여 영혼을 팔아서(기독교권에서 저지를 수 있는 불경의 극치이다!) 24년 동안 온갖 복락을 누렸지만 결국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흥부놀부 이야기처럼 기독교권 세계의 권선징악의 이야기의 하나이다. 이 흔한 소재에다 괴테는 장치 하나를 바꿈으로써, 또 60여 년을 쏟음으로써 근대인의 대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그 하나의 장치는 24년의 한시적 ’계약‘을, 더는 바랄 바가 없어서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까지 악마가 봉사해야 하는 ‘내기’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는 파우스트라는 인물에 엄청난 추동력을 부여했다. ”세계를 그 가장 깊은 내면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 그것을 알고 싶다는 지식욕이 그것이다. 파우스트가 끝없는 앎에의, 경험에의 욕구에 추동된 인물로 상정된 것이다. 그러니 악마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좀처럼 “멈추어라…”라는 계약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직품 [파우스트]는 정교하게 - 장면에 따라 운율을 달리해 가며 - 다듬어진 12,111행이라는 방대한 분량에 달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악마의 설정이다. 그저 악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부정만 하는 영“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활동은 너무도 쉽게 느슨해질 수 있“기에 ”자극하며 작용하고, 이루어주고 마는 동무“로서 신이 주시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바깥에서 온 어떤 거대한 악이 아니고, 내 마음속의 꼬여 있는 부분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작심삼일을 극복하게 하는 조력자로 말이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는 어찌나 매끄러운지, 그는 얼마나 옳은 소리만 하는지 읽다 보면, 연극을 보다 보면 더더욱, 주인공은 파우스트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그 ’옳은 말만 하는‘ 이성의 인물 메피스토펠레스의 매끄럽고 멋진 대사에서 빠져 있는 것이 있다. 사랑이 그것이다. 이런 구상 역시 절묘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메피스토펠레스라는 긴 이름이 히브리어 ’파괴자‘와 ’거짓말쟁이‘ 두 단어의 합성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요컨대 학자이던 파우스트가 그의 도움으로 젊어져서, 이런 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시공을 한계없이 가로지른다. 

그렇게 파우스트가 섭렵하는 온갖 세계의 이야기가 극작품 [파우스트]이다. 제1부는 경험 가능한 세계의 이야기이다. 전반부는 ’학자 비극‘, 후반부는 ’그레트헨 비극‘이라 불리는데, 학문에 대한 회의, 젊음, 사랑, 죄 같은 것들이 다루어진다. 제1부는 막은 없이 장면들로만 이루어지고 -무거운 독백은 아주 긴가 하면, 때로는 줄거리의 생략이 심해서 스토리를 마지막에 가서야 짐작하게 되는 단편적인 형식이다.  제2부는 잘 짜인 5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무대, 즉 파우스트가 경험하는 세계는 엄청난 크기의 시공으로 설정되어 있다. 거의 극대치이다. 지폐가 발행되는 중세 말의 궁정에 파우스트가 등장하다가, 3,000여 년 전의 고대 그리스로, 또한 로마 권력자들의 결정적 전투가 벌어졌던 파르살루스 벌로 갔다가, 다시 왕권과 교황권이 다툼을 벌이는 중세 말기로, 이어 개발의 박차가 이루어지는 물량의 시대, 근현대로 나아간다. 

그 모든 논의가 극작품이라는 형식과 정교한 운문에 담겨서 부분부분들이 선명하고 흥미롭다. 극작품이니만큼, 즉 연극 대본인 만큼 독자는 각 부분에 대하여, 혹은 전체에 대하여 스스로 마음속에서 무대를 만들어 연출을 해보며 얼마든지 상상을 펼쳐갈 수 있다. 

부분들은 매우 선명한 데 비해, 전체는 흔히 보는 극작품의 긴밀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제1부는 체험 가능한 범위의 작은 세계를 다루지만, 신화의 시대와 근대를 오가는 제2부는 거의 시공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는 제2부가 연극의 기본인 5막극 형식을 잘 따르고 있고, 제1부는 막 없이 장면과 장면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학자 비극“이라 불리는 제1부의 전반부는 학문과 인생에 대한 회의를 담은 독백이 길고, ”그레트헨 비극“이라 불리는 후반부는 젊어진 파우스트가 경험하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것이 그럼에도 죄과에 이르고 마는 과정이 담긴 ”비극“이다. 제2부는  그 충격에서 다시 깨어난 파우스트가 경험하는 넓은 세계, 거의 극대치의 세계의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정신사 전체가 포섭되어 있다. 

오늘날, 여기에서, [파우스트]를 다시 전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담은 세계가 크기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때문이다. 때로는 고아하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난해하고, 때로는 코믹하기까지 한 정교한 언어에 담겨 있는 이 깊고도 넓은 성찰들은, 욕망에만 추동될 뿐, 인간이 점점 더 왜소하고 허약해지는 시대에 각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