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술의 엄격함
김상기, ‘단재 신채호의 가계와 독립운동, 그리고 대전‘, [단재 신채호의 흔적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2022.
(38~41쪽)
신채호는 문학이나 언론, 불교학 등 철학에도 뛰어났으나 특히 역사학을 전공하여 민족사학을 정립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역사학자였다. 신채호는 조선사를 저술하는데 동서양의 많은 서적들을 섭렵하였다. 정인보의 증언에 따르면, 신채호가 만주에서 상해까지 오면서 백지에 베낀 [동사강목]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신채호가 [동사강목]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1931년 그를 옥중 면회한 신영우에게 역대 국왕의 치적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실을 수록한 [국조보감]과 영조 조에 편찬된 사서인 [조야집요]를 차입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는 중국의 역사도 훤히 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마천의 책을 애독하였다. 신채호는 상해에서 유자명을 만나 자리에서
”평생토록 서한시대 역사학자인 사마천의 책을 애독하였다. [보임안서]와 [굴원열전]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 라면서 매번 곤란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혹은 심적으로 고민을 하게 될 때마다 굴원열전을 읽으면 정신이 상쾌해진다.“ 라고 자신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굴원이 겪었던 일들을 동정하며 [사기]를 읽은 것을 알려주었다.
신채호는 서양사에도 식견이 높았다. 이관용이 옥중 면회하였을 때 신채호는 그에게 H.G. 웰스의 [세계문화사(일역)]를 구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또 변영로는 신채호가 영문으로 된 칼라일의 [영웅숭배론]과 에드워드 기본의 [로마흥망사]를 보았음을 알려준다. 신채호는 영문으로 된 서양서를 보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의 영문 독해 능력이 있었다 한다. 유자명에 의하며, 신채호가 의열단선언을 발표한 후 북경으로 돌아가 역사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유럽역사와 관련한 논저들을 읽기 위하여 영어공부를 하였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영어회화는 한 마디도 못했지만 영문으로 된 서적은 능히 보았다고 한다. 그는 암기력이 좋아서 영어 사전을 펴고 앉았다 누었다가 하면서 영어 사전을 통째로 암기했다 한다. 신채호는 말년에 아나키즘에 심취했는데, 그가 옥중에서 순국한 후 아들 신수범이 여순 감옥으로부터 받은 유물 중 ’세계대사상전집의 크로포트킨 편 한권‘이 있었다 한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은 러시아 출신의 아나키스트로 ’아나키스트들의 왕자‘라고 불릴 정도로 아나키즘을 이념적으로 정립한 인물로 알려진다.
신채호는 역사 저술을 위하여 승려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채호가 생활이 곤궁해지지자, 이를 알게 된 북경의 친구들의 소개로 북경의 관음사에 들어갔는데, 신채호가 사찰을 찾았던 것은 불교에 귀의처를 찾기 위해서보다는 저술에 전념하기 위한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유자명에게 출가하고 돌아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나는 불교를 믿지 않지만 다만 청정한 우주 속으로 들어가서 일심으로 역사를 쓰고 싶었지. 그리고 우주에 다다르자 비로소 소위 ’세상을 벗어난 청정한 ‘ 우주를 알았지. 오직 축소된 현실세계만이 복잡하기 그지 없음을 알았네.
그는 청정한 마음으로 역사 쓰는데 전념하고 싶어 사찰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가 불교에 귀의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벗어난 청정한 우주‘를 알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불교에 대한 경지를 알게 한다.
신체호의 학문에 대한 태도는 철저하고 엄격하였다. 1923년 3월 북경의 관음사에서 [조선사]와 [전후삼한고]를 집필하였는데, 원고를 보내면서 원고의 한자 한 귀절도 가감하지 말 것을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이 책 받으시는 이에게
누구시던지 이 책 전후삼한고 받으시는 이에게 이하의 조를 요구합니다. 안질 때문에 정서도 못하고 보내오니 미안하지만
1. 본고를 귀지에 개재하지 안하거던 즉시 필자에게 반환할 일(귀사에 투고는 반환치 않는다는 규정이 없습니다)
2. 본고를 게재하는 경우에는 일자이구의 가멸 혹 이동을 부득할 일(본고가 설혹 잘못된 판단이 있다할지라도 연구의 기초와 방법이 피차부동한 이상에는 차라리 본고전부를 부인함은 가하나 자구의 가멸 혹 이동은 불가한 까닭)
일전에 박자혜 편에 부송한 서문은 없이하시오 본초안에 새로 자서를 넣었습니다.(차일지는 본고에 상관없는것)
또한 중국의 [북경신문]과 [중화보]에 사설을 발표하여 생계에 보탰다. 그런데 몇 자의 오신이 있다 하여 이를 이유로 집필을 거절하고 그 뒤에는 일체 원고를 보내지 않았을 정도로 자신의 글에 철저하였다. 또한 그가 옥중에 있던 1931년 11월 16일 조선일보의 기자 신영우가 “선생이 오랫동안 노력하여 저작한 조선역사([조선상고사]를 말함)가 [조선일보]지상에 계속 발표됨을 아십니까? 라고 묻자, 신채호는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비록 큰 노력을 하여서 지은 것이라 하나 그것이 단정적 연구가 되어서 도저히 자신이 없고 완벽한 것이라고는 믿지 아니합니다, 라면서 게재 중지를 요청하였다. 신채호의 역사 서술의 엄격성을 알게 해주는 대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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