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도 중순을 넘어섰다. 매미 소리가 요란해지고 있다. 매미소리가 악을 쓰며 울고 있을 때가 가장 적막했다. 방학이라 친구들도 만나기도 어렵고 혼자만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은 초등학교 때의 것인데 직업으로부터 은퇴한지 오래되었음에도 매미 소리는 여전히 어린 시절 여름방학의 느낌으로 돌아가고 있다.
2026년 808BN ‘아나톨리아 반도 학술여행(4.27~5.5)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시간이었다. 여행 전후 2026년 상반기 내내 아나톨리아에 매달려 있었다. 뇌출혈로 인한 피말리기와 온 몸의 가려움증이라는 몸의 비상신호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 속은 여행 앞뒤를 정리하는 지적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아나톨리아 문명답사는 재난을 겪어보지 못한 운좋은 시대와 공간에서 살아온 내가 역사적 문화적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보려는 질문을 던져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2003년 실크로드 답사 때와 마찬가지로 기본인식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척박한 곳에서도 사람은 살아왔고 어떤 방식으로든 살 방도를 만들어갔다는 것이다. 겨우 70년을 산 내가 상상할수 없었던 사막 지대, 지진, 기후변화, 전쟁을 거치면서 인류는 끊임없이 살 길을 찾아냈다는 점에 찬사를 보낸다. 이희수 교수의 [인류본사]라는 책을 보면서 의문점의 줄거리들이 잡히는듯 했다.
답사 3일째 이동하면서 보았던 끝없는 밀밭과 화산 폭발로 융기된 기암. 그 기암을 파고 들어가 미로를 만들며 숨어들어간 인간.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겹겹의 문명. 지겹도록 깊숙한 생존의 역사들을 풀어내보려한다.
소아시아 라고 불렸던 튀르키예 안탈리아, 에페수스 등에서 보았던 그리스 로마시대 유적. 이 정도면 굳이 그리스 로마를 가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당시 유적이 많이 있다. 이게 뭐지.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 기원전 6천년의 삶, 그리고 이번 답사에는 없었지만 튀르키예 드라마 [더 기프트]로 보았던 괴베클리 테페 유적은 기원전 9천6백년경 삶의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꼬리를 잇는 물음들.
안탈리아에서 보았던 4월말에도 흰눈이 덮혀있던 토로스 산맥. 그 산맥은 아나톨리아 문명사를 보는 중요한 실마리였다. 지리적 지질학적 관점에 따라 아시아의 히말라야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지구적 산맥 사슬의 일부라고 한다. 토로스 산맥은 남부 지중해 연안과 아나톨리아 고원을 나누는 거대한 산맥으로 해발 2천미터 이상의 봉우리들이 동서로 약 800키로미터 뻗어 있으며, 웅장한 카르스트 지형과 깊은 협곡을 형성해 고대부터 문화적 지리적 경계선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내가 그 산맥을 유의있게 보았던 부분은 괴베클리 테페와 또다른 테페들의 위치이다. 이들 테페들이 있는 지역은 튀르키예 동남쪽이자 시리아 북쪽에 있는 토로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물줄기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이루는 고대 인류문명이 탄생한 곳이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지역은 현재 튀르키예 땅으로 그곳에서 구석기에서 신석기에 이르는 인류문명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튀르키예 정부는 샨리우르파 일대의 신석기 유적군을 조사하는 유적발굴 프로젝트 명을 ‘타슈 네페레(돌 언덕)‘이라 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포함해 약 12개의 유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다. 이 일대의 유적은 당대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매우 조직적이고 상징 체계가 공유된 거대한 신석기 문명권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한다. 인류의 정신문명과 건축의 시원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그 경계를 1만2천 년 전으로 끌어 올린 위대한 유적이다.

차탈회위크 유적 전시관에 전시된 지도 그림을 보면 괴베클리 테페를 중심으로 초생달 형태의 범위에서 인류 이동 표시가 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해보면 괴베클리 테페와 타슈 네페레 지역의 12개 유적 네트워크들은 신석기 초기 인류들로 이들이 서쪽 차탈회위크로 이동하고 차탈회위크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곳곳으로 확산되어 갔으리라는 추정이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만으로 보면 괴베클리 테페( BC 9600~8200) 등 인근 신전들이 폐쇄된 이후 차탈회위크 유적(BC 7100~5950)으로 이동된 시기는 약 1천년의 공백이 있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과 차탈회위크 유적 사이 천년의 공백은 인류가 거대한 신전 중심의 수렵채집 사회에서 격렬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밀집형 ‘농경 도시 사회’로 진화해 나간 끈질긴 생존과 변화의 시간으로 설명한다.
과거에는 이 시기를 인류 문명이 단절되었거나 수수께끼로 남은 '암흑기'로 보았으나, 현대 고고학은 이를 "문명의 단절이 아니라, 수렵채집에서 완전한 농경·정착 사회로 나아가는 격렬한 과도기"로 설명한다. 이 공백을 메우는 핵심 학설과 발견들은 첫째, 고고학적으로 토기없는 신석기 후기에서 토기 신석기로 이행기라는 점. 둘째, 공백을 메우는 유적들의 발견으로 타슈 테펠레 처럼 신석기 유적 10여곳의 문화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 확산 변형되었음이 증명되고 있는 점. 셋째 급격한 소빙하기(약 8200년전)로 인해 수렵채집을 도와주던 풍요로운 환경이 변하자 대규모 신전을 유지할 여력이 없어지고 살아남기 위해 농경 기술을 극대화하여 물이 풍부한 콘야 평원(차탈회위크가 위치한 곳) 등으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점. 넷째 괴베클리 테페의 상징이었던 자연과 야생 동물 등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이 천년의 공백기 동안 동물을 가축화하고 식물을 재배하며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야생동물 대신 풍요를 상징하는 어머니 여신(풍요 신앙)과 집안 내부의 조상 숭배로 종교적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는 점 등 이 가간동안 거대한 정신적 세계관의 전환이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유적과 박물관 중심으로 답사하다 보면 발굴된 유물 중심으로 보게 되면서 유물의 신기함과 아름다움에 빠져 시기적 맥락과 공백을 놓칠 수 있다. 예컨대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물에서 바로 철기시대인 히타이트로 넘어가는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동석기, 청동기 시대가 혼재되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전시된 유물들은 있었으나 설명이 충분치 않아 혼돈된 부분이 있어서 찾아보았다.
앙카라의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에서 보았던 청동기 유물들은 히타이트 이전 ‘하티인’들이 만든 것들로 하티인들은 기원전 3천년~2천년경부터 중부 아나톨리아 토착 원주민들이라고 한다. 이들 하티인들은 인도유럽어족인 히타이트인들과는 다른 토착인들로 인도유럽어족이나 셈어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고립어 또는 카프카스어족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히타이트 제국이 들어선 뒤에도 히타이트인들은 종교적이고 신성한 의식을 행할 때는 하티어로 된 문서를 그대로 사용했다. 하티인들은 기원전 2500년경 이미 수준 높은 도시 국가들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대표중심지는 앙카라 동북부에 있는 하투사와 알라자회위크 였다. 알라자회위크의 ‘왕가 무덤’에서 발견된 화려한 청동 사슴 상, 황소 상, 그리고 태양 원반 장식품들은 모두 하티인들의 솜씨였다고 한다. 이 태양 원반은 우주의 질서와 종교적 상징을 담은 것으로 오늘날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의 상징물로도 유명하다.


요약하자면 하티인들은 비록 히타이트라는 거대한 제국의 그늘에 가려져 알려져 있지만, 실상 히타이트 문화와 종교, 예술의 뼈대를 제공한 아나톨리아 문명의 진짜 원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탈회위크 유적(BC 7100~5950)과 알라자회위크를 중심으로한 하티인들(BC 2500년경)과의 사이에는 또다시 3000년 이상의 거대한 시간적 공백이 있다. 이 두 집단의 직접적인 연관 증거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아나톨리아라는 무대에서 피어난 문명인만큼 문화적 종교적 연속성 측면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연관성이 학계에서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차탈회위크 원주민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약 7400년 ~기원전 5600년경에 번성했으며 아나톨리아 남부 코니아 평원에 살았다. 하티인은 초기 청동기 시대로 기원전 약 3000년~2000에 등장. 주로 아나톨리아 중북부의 크즐으르마크 강 만곡 지대(하투사, 알라자회위크 등)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시간적으로 2500년에서 3000년의 공백이 있고 이 긴 시간 동안 아나톨리아에는 수많은 인구 이동과 기후 변화, 문명의 흥망성쇠(동석기 시대 등)가 있었기 때문에 차탈회위크 사람이 곧바로 하티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두 집단을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고리는 바로 종교적 아이콘의 연속성으로 아나톨리아의 모신 신앙이다. 차탈회위크의 풍만한 여성 점토상은 지모신( Great Mother Goddess) 신앙의 시초로 본다. 수천년 뒤 하티인들 역시 대지의 여신을 최고신으로 섬겼고 이 하티의 여신은 훗날 히타이트로 이어져 ‘아린나의 태양 여신’이 되고, 더 나아가 아나톨리아 전역에서 숭배된 키벨레( Cybele) 여신으로 진화한다. 또한 차탈회위크 집 내부 벽면에 설치된 수많은 ‘황소 머리 (또는 뿔) 장식은 당시 황소 숭배 사상을 보여준다. 하티인들 역시 폭풍의 신을 상징하는 동물로 황소를 신성시했으며 알라자회위크 유물에서 정교한 청동 황소상이 대거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차탈회위크에서 태동한 대지 (여성)와 황소(남성) 중심의 신앙 체계가 아나톨리아 토착민들의 가치관으로 면면히 이어져 하티인에게까지 전달되었다고 본다. 또한 유전학적으로 최근 고인류 유전자 분석 기술이 발달하면서 신석기 시대 아나톨리아 농경민(차탈회위크 등)의 유전적 혈통이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 토착민들에게 상당 부분 이어졌음을 확인하고 있다.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의 연대기 순 배치 속에서 두 문명의 묘한 닮은꼴을 찾아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외에도 차탈회위크에서 보여준 집안 벽에 찍은 스탬프 인장의 문양은 주로 소용돌이, 지그재그, 미로 같은 기하학적 패턴이었는데 하티인들에게도 고유의 기하학적 문양이나 십자가, 태양 무늬가 새겨진 청동 및 석재 인장을 사용 ’도장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또한 사후 매장 문화와 죽은 자를 기리는 관점도 아나톨리아 특유의 정서가 흐른다.




차탈회위크 원주민과 하티인 사이의 2500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에는 아나톨리아 반도 곳곳에 또 다른 문명들이 있다. 이 사이의 중간 시대를 동석기 시대( Chalcolithic Age, 기원전 약 5500년 ~3000년)라 하는 이 시기는 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이자, 구리를 조금씩 제련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유적과 유물이 존재한다. 차탈회위크에서 자동차로 몇 시간 거리에 있는 하칠라르 유적은 두 문명의 중간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유적으로 수많은 여신상(지모신상)이 출토되었다. 잔하산 유적(BC 5500~4500년경)에서 발견된 구리 팔찌와 구리곤봉머리는 훗날 하티인들이 보여준 청동 황소와 태양 원반을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아나톨리아 서부에 위치한 베이체술탄 유적을 동석기 시대 후기(BC 4000~3000년)부터 청동기 시대까지 수천 년간 인류가 계속 거주했던 중심지인데 이곳에서 차탈회위크 가옥 내부의 황소 뿔 장식이 어떻게 하티-히타이트 시대의 독립된 대형 신전 구조로 진화했는 보여주는 유적이다. 또한 이 시기 결정적 유물은 기하학적 채색 토기로 차탈회위크 후기부터 나타난 하칠라르와 잔하산에서 정점을 찍은 이 토기들은 붉은 색이나 갈색 물감으로 지그재그, 소용돌이, 다이아몬드 패턴을 빽빽하게 그려넣었다. 이 기하학적 패턴은 차탈회위크의 ‘스탬프 인장’ 문양에서 유래해 토기 표면으로 옮겨갔고, 수천 년 뒤 하티 문명의 투공 청동 태양 원반 내부를 채우는 복잡한 기하학적 살의 모티브로 최종 진화하게 된다.
정리하면, 차탈회위크가 문명의 씨앗을뿌린 뒤, 하칠라르, 잔하산, 베이체술탄 같은 동석기 시대 유적들이 그 씨앗을 이어받아 진흙 여신상을 세련되게 다듬고, 구리를 녹이기 시작했으며, 뿔 숭배를 신전 구조로 체계화하는 중간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이 2500년간의 끈질긴 기술적 예술적 축적이 있었기에 기원전 3000년경 하티 문명의 화려한 청동기 예술이 폭발할 수 있었고, 차탈회위크 신석기 인류는 동석기 청동기를 거치면서 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할 수 있으며 문명의 핵심 요소를 지니고 기술적으로 발전해나갔다 할 수 있겠다.
아나톨리아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문명은 시루떡 처럼 켜켜히 층을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 문명들은 애매하게 비빔밥이 될 때가 많다. 그런 점들이 재미있기도 하다. ‘하티인’들 처럼 아나톨리아 원주민들은 어떤 사람이며 원주민의 시대구분은 어떤지 알아보았다. 통상적으로 원주민 시대 구분은 기원전 2천년경(혹은 기원전 2천5백년경)을 기준으로 하고 언어적으로 인도유럽어족 유입 이전으로 볼 때 가장 대표적인 토착 원주민이 ‘하티인’이다. 기원전 2천년을 기점으로 히타이트인, 루위인, 팔아유인 등 인도유럽어족 계열이 들어왔다. 또한 기원전 20세기 초 메소포타미아 앗시리아 상인들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교역소를 세우면서 쐐기문자를 들여왔는데 이때부터 아나톨리아 ‘역사시대’가 개막하므로 그 이전의 신석기(차탈회위크), 동석기, 초기 청동기 시대를 아나톨리아 고유의 원주민 문화가 발달했던 ‘선사적 원주민 시대’로 분류한다고 한다.
안탈리아와 에페소스 등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에서 보았던 그리스 로마문명의 강렬한 흔적들을 보면서 ‘이게 뭐지’라고 했던 물음. 그 흔적들을 더듬어 본다. 튀르키예 소설과 드라마에서 보았던 다양한 인종의 전시장같은 느낌, 슬픔 (혹자는 우리나라의 ‘한’같은 슬픔). 고대로부터 살아왔던 그리스인들이 1923년 아타튀르크 정책으로 그리스와 터키 지역 인종 맞교류하게 되고, 종교탄압으로 고대부터 살아왔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쫓겨나가는 상황. 이미 섞일대로 섞여 혼종된 생물학적 종족들이 해체되고 분리되는 경험 등이 소설로 드라마로 보여졌다.
[바울]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에페소스로 간다고 했을 때, 아니 그 먼길을 많은 사람들이 그까지 간다고? 였다. 소설 [토지]에서 서희 일행들이 경남하동에서 머나먼 만주로 이동할 때도 이해되지 않았다. 일본을 피해간다고 하긴했지만 만주땅은 고조선이 있던 땅이라 이국이 아닌 우리땅의 느낌으로 갔을거라 생각해보면 로마 사람들에게 에페소스는 우리의 고조선 같은 느낌이 있지 않았을까 이해해본다.
기원전 1600년경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 섬 사이에 있는 산토리니 섬에서 화산이 폭발했고, 기원전 1450년경에도 화산이 폭발하면서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에서 그리스 미케네 문명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고, 이집트 문명도 화산 폭발에 영향을 받아 중동으로 방향을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히타이트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지면서 지중해 인류 대이동이 만들어졌다.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은 땅의 크기에 비해 훨씬 큰 부와 문명을 지니고 있었는데 미노아 문명은 에게해와 지중해를 오가는 해상무역권을 이미 쥐고 있었기에 가능한 문명. 아나톨리아 반도 원주민 구분을 기원전 2천년으로 기준할 때 기원전 1600년경의 산토리 화산 폭발 이전부터 아나톨리아 서남부권은 이미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33년경 알렉산더가 거침없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휩쓸고 지나갈 때 난공불락이었던 곳이 있다. 안탈리아에 있는 테르메소스 지역이다. 해발 1천미터 고지에 자리잡은 테르메소스는 그리스나 로마 이주민이 아닌 아나톨리아 토착민이 세운 독특한 고대도시였다고 한다. 인근 해안 도시들(페르게, 아스펜도스 등)이 그리스 이주민에 의해 개척된 것과 달리, 아나톨리아 순수 토착 부족인 피시디아( Pisidia) 계열의 ‘솔리미( Solymi)’ 부족이 세우고 지켜낸 도시라고 한다. 이들은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 전까지 피시디아어 와는 또 다른 솔리미어 라는 고유의 토착 언어를 사용했고 훗날 로마 제국 시기까지도 동전에 ’자치 도시‘라는 문구를 새겨 넣을 만큼 만족적 자립심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또한 이들은 험준한 토로스 산악 지대에서 살아온 매우 거칠고 용맹한 전사들이었으며 현재 귈뤽산인 솔리모스 산의 이름을 딴 솔리메우스라는 아나톨리아 토착 신을 섬겼는데, 이는 최소 4천년 전부터 이 지역의 산악 신앙에서 출발한 토착신앙이다. 또한 이들은 척박하고 가파른 산악지대에.거대한 아고라, 극장, 극장식 의사당을 건설했는데 특히 물이 귀한 높은 산 정상에서 대규모 인구(전성기 기준 약 15만 명 추정)가 생존할 수 있도록 암반을 깎아 거대한 저수조를 만들고 정교한 수로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아무리 튼튼한 암반을 깎아만든 저수조가 있다한들 중간에 올라오는 수로가 몇차례의 지진으로 파괴되면서 결국 산 정상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던 아픔이 있었다.

애초 여행 일정에는 안탈리아에서 테르메소스 정상까지 가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참가자들의 연령층을 고려하여 페르게와 에스펜도스로 방향을 옮겼었다. 사람은 살 수 없었으나 현재도 테르메소스 대극장 등의 유적들이 남아 있어 ’공중 위의 대극장‘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암반에 직접 고정된 구조 덕분에 수차례의 강진에도 불구하고 극장의 원형이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이는 페르게나 아스펜도스 극장도 마찬가지이다. 암반 통구조가 지진과 동시에 흔들리게 함으로써 진동을 최소화할 수 있게한 건축기술이 있었다.
괴베클리 테페가 있는 강의 상류 지역을 뒷배경으로 하고 있는 토로스 산맥을 타고 인구 이동을 한 인류도 있었을 것이고 이들이 산악 문명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한편 차탈회위크 신석기 인류는 맹수 등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를 위해 땅에서 사다리로 지하로 내려가는 방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한 방식이 카파도키아 지역을 암굴집 형태를 만들었던 아닐까. 암굴집 형태는 아나톨리아 남부의 석굴무덤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암굴 형태는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여전사 아마존 왕국이 있었다는 아나톨리아 동북부 흑해 인근의 아마시아 지역의 사진을 보면 여기도 산 절벽을 이용한 암굴형태의 집 모양이 보인다.

아나톨리아 원주민들의 문명과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문명, 튀르크족의 이동으로 인해 현재 튀르키예의 본류인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유목민 문화 등이 층층히 겹겹히 혼재되어 있는 것을 이번 여행 전후로 보고 읽게되었다. 거의 단일민족에 가까운, 지진이 없었던 곳에서 살아온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벅찬 여행이었다.
다시 튀르키예 여행을 한다면 가보고 싶은 곳은 괴베클리 테페가 있는 샨느우르파 지역, 흑해 연안지역, 그리고 오스만 시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시난이 지은 셀리미예 사원 등 이다. 그 시간이 갑자기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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