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462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공지영, [높고 푸른 사다리], 한겨레출판, 2013.(330~342쪽)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저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터를 다닌 지 오래였지만 그토록 기괴하고 처참한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소리치지도 난동을 피우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조용히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간절하게요. 끔찍하고도 간절하게…….불과 6킬로미터 뒤로 중공군이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쌍안경을 눈에서 떼지 못했어요. 지금도 생각납니다. 피아노를 든 가족도 있었죠. 바이올린을 등에 멘 소녀도 있었어요. 배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1000명이 정원인 배는 보통 5000명을 태웠죠. 그러나 그것도 모자랐어요.해군 대령 하나가 배 위로 올라왔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저는 나가 대령을..

중국 관련 참고자료

오디오매거진 [정윤수의 도시극장], 베이징 편, 2025년 6월호에서 언급된 책과 영화ㅡ 조경란,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글항아리, 2013"행복한 감시사회"ㅡ 그레이엄 엘리슨, 예정된 전쟁(정혜윤 옮김), 세종서적, 2013ㅡ 유효파(류샤오보), 1955~2017.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ㅡ 이유진,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메디치미디어, 2018ㅡ 모순(마오둔), 1896~1981ㅡ 위앤커, 중국신화전설, 민음사, 1988.ㅡ 정성일,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ㅡ 스유엔, 상경, 김태성 정윤철 옮김, 더난출판사, 2008.ㅡ 렁청진, 변경, 김태성 옮김, 더난출판사, 2008ㅡ 리쩌허우 류짜이푸, 고별혁명, 김태성 옮김, 북로드, 2003ㅡ 조설근, 고악, ..

모두가 그리는 공동의 초상화

톰 오버턴 엮음, [풍경들 - 존 버거의 예술론](신해경 옮김), 열화당, 2019.(96~99쪽)매일 아침 일이 끝나면 그는 나와 같이 커피를 마시며 마을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는 온갖 재앙이 있었던 날의 날짜와 요일을 기억했다. 그는 모든 결혼식의 열린 달을 기억했고, 결혼식마다 할 얘기가 있었다. 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든 사돈의 팔촌까지 가족 관계를 줄줄이 읊을 수 있었다. 가끔 나는 그의 눈에서 어떤 표정을, 어떤 공모의 눈빛을 보았다. 무엇에 대한 공모였을까. 우리 둘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공유하는 어떤 것을 공모하는 눈빛이었다. 절대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 우리를 묶어 주는 어떤 것 말이다. 내가 그를 위해서 해 주는 사소한 농장일은 절대 아니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게 무얼까..

우리의 문제는

유발 하라리, [넥서스](김명주 옮김), 김영사, 2024인간이 힘을 남용하는 원인은 개인 심리에 있지 않다. 인간은 탐욕스럽고 교만하고 잔인하지만, 동시에 사 랑, 연민, 겸손, 기쁨도 느낄 수 있다. 물론 최악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탐욕과 잔혹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서 악의를 품은 행위자들은 권력을 남용할 마음을 쉽게 먹는다. 그렇다면 왜 인간 사회는 최악의 구성원에게 권력을 맡기는 선택을 할까? 예를 들어 1933년에 독일인 대부분은 사이코 패스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히틀러에게 투표했을 까?통제할 수 없는 힘을 불러내는 인간의 경향은 개인 심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대규모로 협력하는 우리 종의 독특한 특징에서 비롯한다. 이 책의 핵심 논지는, 인간은 대규모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

그리곤 서로 껴안았다

존 버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김우룡 옮김), 열화당, 2019(2005 초판).(46~48쪽)오두막을 지은 뒤로 토니오는 이 엘 레켄코 계곡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깨져 나간 바위, 너도밤나무, 드문드문 보이는 잔디들, 말라서 바닥을 드러낸 여울들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그린 검은 화폭엔 이 지역의 굴곡진 땅의 모든 것이 마치 고대의 커다란 거북등을 연상시키듯 표현되어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독수리가 맴돌았다. 그림을 그릴 때면 그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 소리는 마치 땅에 있는 먹잇감들을 격려하면서 그 마지막 신음소리를 흉내내는 것처럼 들렸다.엘 레켄코에서 소를 치려면 반드시 소몰이꾼이 필요했다. 작은 키에 땅딸막한 체격의 안토닌은 낡은 트럭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신고 있..

깊이 나아가고 스스로 체득한다

위잉스, [위잉스 회고록](이원석 옮김), 마르코폴로, 2023.(185~189쪽)쳰(첸무 錢穆 1895~1990) 선생님은 내 지도교수였으나 내게 어떤 연구 제목도 주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제목과 논지를 정한 다음에 그 분과 논의해야 했다. 이것 역시 “깊이 나아가고 스스로 체득한다.”라는 맹자 원칙의 실천이었다. 당시 나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도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방향은 중국 사회경제사로 기울었다. 20세기 전반 중국과 일본의 사학계는 위진남북조 시기를 아주 활발하게 연구하여 매우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나는 문벌 사회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유가와 도가의 상호 투쟁과 문벌의 관계를 추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를 경험적으로 검토해 보는 작업에 대..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24(2014초판).(112~116쪽)그해 나는 스물세살의 교대 복학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내가 소회의실의 조원들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그 밤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그만큼 오합지졸이었다는 걸 뜻합니다.우리 조의 절반 이상이 미성년자였습니다. 장전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정말 총알이 나간다는게 믿기지 않아, 도청 앞마당에 나가 밤하늘을 향해 한발 쏘아보고 돌아온 야학생도 있었습니다. 스무살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집으로 보낸다는 지도부의 지침을 거부한 건 바로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의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만 17세까지만이라도 억지로 돌려보내는 일에 긴 언쟁과 설득이 필요했습니다.상황실장으로부터 내가 지시받은 작전은 실..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24(2014초판).Han Kang, Human Acts(trans. Deborah Smith), Hogarth, 2016.(99~103 쪽)(101~104 pp)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After you died I could not hold a funeral,And so my life became a funeral.어이, 돌아오소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Oh, return to me.Oh, return to me when I call your name.Do not delay any longer. Return to me now.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당신을 보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