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2 아스카 나라,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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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와 나라는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가는 답사의 핵심이며, 일본 고대문화의 하이라이트이다. 일본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전 과정이 아스카에 남아 있고, 마침내 그네들이 그토록 원하던 고대국가를 탄생시킨 곳이 나라이다.
아스카를 가면 우리나라의 부여가 떠오르고, 나라의 옛 절을 보면 경주를 연상하게 된다. 볼거리도 많고, 이야기도 많고, 문화유산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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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이 완전히 남남으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후반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 특히 한반도에 고대국가가 탄생하는 300년 무렵부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 등 다섯 나라의 외교적 친소 관계는 자국의 이익에 맞추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왕까지 죽이면서 싸웠던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다. 반면에 백제와 왜는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 왜는 가야의 철기문화를 받아 비약적인 문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야와 함께 신라를 쳐들어가기도 했다. 백제는 왜에 문명을 전해주었고 그대신 수시로 군사적 지원을 받은 맹방이었다.
일본을 답사하면서 백제 무령왕이 규슈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663년 백촌강 전투 때 일본이 백제 부흥권을 돕기 위해 무려 2만7천명의 병력을 지원했다는 사실, 나당연합군에 패한 일본과 백제 망명인들이 다자이후에 수성과 대야성을 백제식으로 쌓은 것이 지금도 남아 있는 사실을 보면 그때 그런 일이 다 있었던가 스스로 놀라게 된다.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지만 일본의 고대문명이 한반도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야요이시대의 벼농사와 청동기 문화, 고분시대의 철기문화와 스에키라는 질그릇문화, 아스카 나라 시대의 불교문화, 그리고 규슈의 도자기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힘으로 이룩해낸 것이었다.
일본의 고대사회는 결국 중국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더 큰 문화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이야기이고 처음에 영향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한반도로부터였다. 한반도를 거쳐왔다는 생각은 동아시아 문화는 일본에서 결실을 맺었고 한반도는 교량 역할을 하였을 뿐이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한국 중국 일본의 문화적 성취는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디테일에서는 각기 다른 특질을 보여준다. 이것은 동아시아 문화의 보편성과 함께 한 중 일 3국의 독자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본의 청동기시대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땅을 점령하다시피 해서 이룬 문화였으며, 문자의 전래는 왕인 박사의 은혜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반면에 나라시대 동대사 대불의 조성은 그네들의 노력의 결과였으며, 다도와 무사도는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독자적인 문화였다.
그 점은 한국의 문화가 중국에 신세진 점과 마찬가지다. 전진의 순도가 불교를 전래해준 것은 은혜였으며, 월주요의 청자를 벤치마크하여 고려청자를 만들어낸 것은 고려인의 늘기였으며, 문익점은 목숨을 걸고 목화씨를 들여왔다. 한글과 선비문화는 우리들의 창조적인 문화였다.
삼국시대가 끝나고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서면 한반도의 정세변화는 일본 열도에 더이상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때 일본도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게 된다. 동대사, 흥복사, 당초제사의 건축과 조각은 일본이 내세우는 자랑스러운 문화적 성취다. 일본의 문화가 이처럼 아이덴터티를 획득하고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성장한 것을 한국인은 액면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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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대여섯일 때 나는 '꿈을 파는 집'에서 자전거 한 대를 빌려 타고 아스카 들판을 순례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꿈같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다카마쓰 고분, 도래인 신사인 오미아시 신사, 쇼토쿠 태자의 탄생설화가 깃든 귤사,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으로 알려진 석무대, 일본 최초의 절인 아스카사, [만엽집]의 무대였던 아마카시 언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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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국가를 탄생시킨 100년 왕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적은 퇴락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아스카에 처음 왔을 때 내가 받은 인상은 퇴락한 부여와 아주 비슷했다.

550년 무렵 개막된 아스카 시대는 710년 수도를 나라의 헤이조쿄로 옮기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지금과 같은 폐도가 되었던 모양이다. 헤이조쿄로 떠난 지 70년 남짓 만에 편찬된 [만엽집]에 실려 있는 한 가인의 노래를 보면 쓸쓸한 아스카에 대한 회상이 절절하다.
신이 계시는 신악/ 가지가 무성히/ 뻗어 있는 솔송처럼/ 계속해서 무성히/ . . . /끊임없이 이처럼/ 계속 다니고 싶은/ 아스카의 오래된 도읍지는/ 산도 드높고/ 강도 웅대하구나/ 봄날이 되면/ 한없이 산이 사랑스럽고/ 가을밤에는/ 강물 소리가 맑네/ 아침구름에/ 학은 어지러이 날고/ 저녁 안개 속엔/ 개구리 울어댄다네/ 무엇을 봐도/ 눈물이 절로 나네/ 그 옛날을 생각하자니.
ㅡ 야마베노 아카히토 [만엽집] 제3권324
130: 지금 사람은 570년 전 옛날의 단아함에 미치지 못하고, 570년 전 사람들은 1400년 전의 절제된 조형감각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법륭사 보물관(1999 다니구치 요시오가 설계함)에 황실에 헌납한 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음.
남대문(국보. 570여년 전 무로마치 시대의 건물)
법륭사 오중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첫인상은 산모롱이를 돌아서면서 만나는 화순 쌍보사의 목탑 양식 대웅전을 떠올리게하는 친숙함이다.
중문: 가람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경복궁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근정문처럼 정중하게 느껴진다. 기둥에는 배흘림이 있고 주심포 건물로 공포 이음새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단순한 간결미가 있다. 이 중문 자체가 국보로 아스카시대 건물이다.
134: 일찍이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미의 특질을 곡선의 아름다움에서 찾았는데 나는 이곳 일본 땅 법륭사에서 직선의 미를 본다. 한국의 건축은 하늘을 향해 날갯짓하는 상승감의 표정이 많은 데 비하여 일본의 건축은 대지를 향해 낮게 내려앉은 안정감을 강조한다. 그것은 미감의 우열이 아니라 두 민족의 정서의 차이일 뿐이다.
오중탑의 비례감은 부여 정림사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과 비슷했다. 그러면 그렇지
139: 법륭사 서원가람의 회랑이 품위있으면서도 아름답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은 저 창살 때문이다.
나라의 헤이조쿄와 남도 7사
183: 710년 일본의 수도가 될 때 계획도시로 설계된 헤이조쿄에 기초했다. 헤이조쿄는 당나라 장안을 본떠 바둑판처럼 정연히 구획되었다. 그때 일본은 거의 열광적으로 문명의 모델을 중국에서 찾던 때였다.
궁궐인 헤이조쿄궁은 동서 1.3킬로미터, 남북 1킬로미터, 약 39만평(경복궁의 3배)이었다. 궁궐 사방은 축지원이라 불리는 높이 6미터의 담장으로 둘렀다. 도시 전체는 동서 4.3킬로미터, 남북 4.7킬로미터였으며 당시 도시 인구는 10만명 내지 20만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의 정문인 남대문에서 도성의 남문인 나성문까지는 폭 75미터의 주작대로가 곧게 뻗으면서 도시를 양쪽으로 갈라 동쪽을 좌경, 서쪽을 우경이라 했다.
동서남북으로는 간선도로가 반듯하게 나 있었다. 동서대로는 조라 하여 9조까지 있고, 남북대로는 방이라 하여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서 각기 4방씩 서1방에서 서4방까지, 동1방에서 동4방까지 있었다. 뉴욕의 애비뉴(남북길)와 스트리트(동서 길) 개념과 똑같다. 조와 방으로 이루어지는 한 블록은 사방 531미터였다.
당시 도성 안에는 많은 시설들이 들어서서 723년에는 모두 48개 사찰이 있었다니 요즘 서울의 동네마다 있는 교회당이 녹지공원과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그중 대표적인 사찰이 ‘남도 7사’라 불리는 동대사, 서대사, 흥복사, 대안사, 원흥사, 약사사, 법륭사이다.
좌경에는 후지와라쿄에 있던 대관대사를 옮겨온 대안사(다이안지), 소가씨의 씨사인 아스카사를 옮겨온 원흥사(가고지)가 있다. 또 좌경은 궁궐 서쪽인지라 서대사(사이다이지)도 있다.
우경의 중심부에는 약사사(야쿠시지)가 있다. 약사사는 우경 서2방과 6조가 만나는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헤이조쿄는 네모반듯한 직사각형이면서 궁궐 동쪽에는 날갯죽지처럼 몇개의 블록이 붙어 있었다. 이를 외경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외경에 후지와라씨의 씨사인 흥복사와 천황이 발원한 동대사가 들어서 있었다.
남도 7사 중 법륭사만 도성 밖 남쪽 이카루가에 있었다. 당초제사(도쇼다이지)가 남도 7사에 들지 못한 것은 도성 건립 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185. 나라의 답사는 당탑과 불상 답사이고, 교토의 답사는 명원 답사라고 할 수 있다.
나라시대에 불교가 양적으로 확산된 뒤 헤이안시대에서 무로마치시대로 이어지는 교토로 가면 이제 진리 탐구의 공간으로서 사찰을 추구한 것 같다.
나라 시내에 있는 의수원(이스이엔)이라는 작고 예쁜 정원이 빛을 발한다. 메이지시대 정원인지라 연륜으로 보나 규모로 보나 교토의 그것에 견줄 바 못 되지만 나라에서는 명소로 손꼽힌다.
의수원은 흥복사에서 동대사로 가는 길에 동대사 주차장을 다 가서야 나온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명원의록수’ 즉 ‘명원은 녹수에 의한다’라는 시구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의수원 안에는 1969년에 세워진 영락(네이라쿠) 미술관이라는 아담한 미술관이 있다. 주로 중국 청동기와 한중일 삼국의 도자기들이 전시된 100평 규모의 작은 미술관이지만 여기에는 고려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도 있고 특히 명품 다완이 많다. 뒤 정원에는 와카쿠사산(양초산)과 가스가산(춘일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대사 남대문의 기왓장들이 햇빛을 받아 그 반짝이는 빛이 흘러내려 절묘한 풍광을 자아낸다.
187: 나라국립박물관은 본관과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관은 1894년에 건립되어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상설 전시를 하고 있고 신관은 1972년 건립되어 특별전을 열고 있다. 수장품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나 일본 불교미술의 보고라 할 정도로 질이 우수하고 특히 불상실은 일본 조각사를 망라하고 있다. 우리나라 유물로 통일신라의 불상과 고려의 청자정병, 불화, 불기 등 몇 점이 소장되어 있다. 법륭사, 흥복사, 동대사, 약사사, 당초제사 등 고찰의 보물관에서 무수히 많은 불상을 비롯해 불교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으로도 족하기 때문이다.
198: 야마토 문화관, 와고지라는 큰 호수 위로 불쑥 솟아 있는 아름다운 솔밭 동산에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룬 약 8백평 규모의 아담한 일본식 건물이다. 일본 전체에서도 특색있는 사설 미술관으로 손꼽힌다. 한국 일본 중국 등 이른바 동양 3국의 고미술품에만 집중하여 동양미술의 보편성과 각 나라의 특질을 보여주는 비교 전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일본 내 굴지의 한국미술품 컬렉션이라 할 만하다.
206: 아스카 나라를 답사하면서 만나는 유물과 연관하여 정리할 수 있다. 아스카시대는 법륭사 백제관음 같은 도래 불상이 등장하고 도리 불사가 아스카 대불, 법륭사 석가삼존상 등을 제작한 시기다. 하쿠호 시대는 법륭사 몽전관음, 중궁사 반가사요상, 약사사 약사여래상, 흥복사에서 출토된 산전사 청동불두 등의 불상이 일본화되면서 대단히 현세적 이미자가 강한 불상이 나타나는 시기다. 그리고 나라시대 또는 덴표시대는 흥복사의 십대제자상, 동대사의 대불, 당초제사의 불상과 감진 스님 초상조각 등 당나라 영향으로 풍만하고 육감적인 국제적 양식의 불상이 나타나는 시기다.
흥복사에서는 하쿠호시대의 대표적 불상과 덴표 불상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흥복사(고후쿠지)는 본래 710년 헤이조쿄 천도와 동시에 궁궐 동쪽 외경에 지어졌다. 오늘날 나라를 상징하는 절은 동대사지만 나라 천도 당시에는 흥복사가 대표적인 사찰이었고 동대사는 흥복사보다 반세기 뒤에나 지어졌다.
흥복사는 막강한 호족 가문인 후지와라씨가 나라 천도와 동시에 씨사로 건립한 것이다. 후지와라의 원래 성은 나카토미였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다이카개신이 이루어지는 ‘을사의 변’(645) 때 훗날 덴지 천황으로 등극한 나카노오에 왕자를 도와 소가노 이루카를 살해한 공으로 후지와라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것은 백년 세도 소가씨의 몰락이었고 후지와라씨의 새로운 부상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후 후지와라씨는 나라시대, 헤이안시대까지 400여년간 정권을 잡은 거족으로 번성했다. 지금의 나라 공원 전체가 다 흥복사였으니 얼마나 장대했을지 상상할 만하지 않은가.
216: 흥복사 국보관의 조각들을 보고 일본의 불상 조각이 그렇게 뛰어난 줄은 미처 몰랐다. 일본의 고대 불상이라면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도래 양식과 도리 불사가 일으킨 토착화 과정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그런 문화적 모방기를 지나서 자기 양식을 만들어내고 독자적이고 풍부한 불교문화를 창출했다는 것을 여기서 비로소 알았다. 내가 일본의 불상 조각과 사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흥복사 국보관을 본 다음부터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불상은 ‘산전사(야마다데라) 청동불두’이다.
248: 이월당은 무엇보다도 자리앉음새가 뛰어났다. 동대사 대불전과 그 넓은 절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동대사를 내려다볼 때 그 옛날 동대사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큰 절이었던가를 실감하게 된다. 동대사에서 국보로 지정된 건물 여섯 채 중 하나이다. 이 법당의 본존은 비밀에 부쳐진 십일면관음보살사잉다. 두 분이 모셔져 있어 대관음 소관음이라 불리는데 이는 몇백년을 두고 공개되지 않은 비불로 아직껏 누구도 본 일이 없고, 또 볼 수도 없다고 한다.
이월당 바로 곁에 있는 삼월당까지 들렀다. 그때 본 삼월당은 큰 감동이고 또 충격이었다. 동대사에 대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달라졌다. 우선 삼월당은 자리앉음새가 이월당만큼이나 뛰어나다. 삼월당은 맷돌문과 함께 동대사의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주 아름답다. 삼월당 건물은 불상을 모신 정당과 예불자가 들어가는 예당 둘이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다. 남쪽으로 향한 정당의 정면을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세모꼴 벽면이 낮게 내려앉은 자세로 좌우대칭의 정면관을 이루는데 기둥 위 공포 구조가 아주 심플한 멋을 보여주고 창살도 단아한 모습이다. 어찌 보면 단정하고, 어찌 보면 근엄하고, 어찌 보면 신비롭다. 삼월당의 진정한 가치는 거기에 봉안된 16구(부동명왕 앞 동자까지 18구)의 불상들에 있다. 그중 14구가 덴표시대 불상 조각이고 모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를 두고 ‘덴표 불상의 꽃’이라 칭송한 분도 있다.
253: 일본 역사상 나라시대는 헤이조쿄에 도읍을 둔 8세기로 이 시기 동아시아는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이렇다 할 전쟁이 없이 모처럼 찾아온 평화의 시대였다. 이때 세 나라 모두 문화의 꽃을 피웠다.
당나라는 이태백과 두보가 활약하던 성당 시대였고, 통일신라는 에밀레종 불국사 석굴암을 탄생시킨 경덕왕(742~765) 시절이 있었으며, 발해는 해동성국이라는 칭송을 받던 문왕(737~793) 때였다. 일본에서는 이 고대문화의 전성기를 덴표시대(729~749)라 부르며, 당시 문화의 성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동대사이다.
동대사의 역사는 쇼무 천황이 741년에 국분사(고쿠분지)와 국분니사(고쿠분니지)를 건립하라는 조칙을 내린 때부터 시작된다.
쇼무 천황은 화엄 세계의 장엄함을 지상에 구현한다는 거대한 이상을 갖고 743년 11월5일, 대불을 조성하라는 자못 엄격한 조칙을 발표했다.
263: 세계적으로 고대의 제왕들은 어느 순간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종교 건축을 지었다.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인도 카니슈카왕이 세웠다는 높이 200여 미터의 13층탑, 중국 북위 시대의 운강 석굴, 백제의 익산 미륵사, 신라의 경주 황룡사, 그리고 나라의 동대사 등은 제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며 그 조성 과정은 국민통합의 동기 부여라는 성격을 지녔다.
동대사 대불 조성은 결국 황실과 정부의 사업이면서 국민의 결속을 도모하고 학문과 사상을 통합하는 효과를 동반했다. 나아가서 국제적으로는 자국의 문화 능력을 이웃나라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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