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이춘아 2026. 1. 24. 14:21


유홍준, [안목], 눌와, 2018(2017 초판).

27~29:
정조는 [경희궁지]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보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는 곳이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한 삼봉 정도전(1342~1398)은 [조선경국전]에서 궁궐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궁궐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정도전이 말한 이 건축 정신은 일찍이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에 대해 한 말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작신궁실 검이불루 화이불치(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새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상 이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백제의 미학이고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이 아름다운 미학은 궁궐 건축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으며,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발전시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간직해야 할 소중한 한국인의 미학이다.


지난 세밑이었다. 명절 때만 되면 목욕탕에 갔던 추억이 떠올라 아랫동네에 있는 사우나에 가다가 큰길가에 있는 미장원 앞에서 이렇게 쓰여 있는 입간판을 발견했다.

최고의 미용실. 미 카사.
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華而不侈: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놀랍고도 기쁜 마음이 그지없었다. 이제는 미장원까지 이렇게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에 동의할진대 우리 시대 건축들은 어떤지 잠시 반성하게 된다. 면면히 이어온 이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은 건축이 많이 세워져야 먼 훗날 후손들이 ‘그네들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우리 시대의 삶을 존경하고 그리워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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