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딜쿠샤

이춘아 2024. 2. 15. 14:53

2024.2.15(목) 어제 밤부터 가랑비 조금씩

2024년 첫번째 번개모임으로 이순형선생님이 ‘딜쿠샤’ 방문을 제안하셨다. ‘딜쿠샤’ 라는 이상한 이름을 지닌 건축물은 언제 한 번 가보리라 마음 먹었던 곳이라 대전서 서울로 올라갔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서대문형무소전시관 인근에 2022년 3월에 개관했다고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도  잠시 구경하고 모임에 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 경로 (1919~1945)


가겠다고 마음 먹고 올라가긴 했는데, 막상 딜쿠샤 라는 이름을 지닌 건축물의 의미도 찾아보지 않고 왔다는 뒤늦은 자각. 다행히 이순형선생님이 종이자료를 파일로 만들어 주셔서 공부를 하고 가서 그나마 정보를 채우고 딜쿠샤로 갔다.  6명이 함께 보고 저녁 먹고 차도 마시고 정담을 나누었다.

내가 딜쿠샤 라는 빨간 벽돌의 근대 건축물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오래된 빨간 벽돌의 서구식 건물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직후, 전단지 배포 건으로 내가 다니던 교회가 풍비박산이 되고 뿔뿔이 흩어졌다. 교인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서점에서 예배를 보다가 옮긴 곳이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건물이었다. 몇 해 그곳에서 예배를 보았다.  당시는 그 건축물에 요즘 같은 문화재로서의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예배 모임 장소였을 뿐이었다. 선교사들이 거주했었다고 하는 빨간벽돌의 서구식 건물에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으로  올라갔고 이층의 어느 방 하나를 예배장소로 사용했다. 2~3년 그곳서 예배를 보다가 장승배기로 이전했었지만 그곳에서 예배를 보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선교교육원 건물.


딜쿠샤에 관한 자료를 읽다가 80년대 예배장소였던 선교교육원 위치를 찾아보니 충정로2가 190-1. 1923년 신축되어(어떤 자료에는 1931년 건축되었다고 함) 지금까지 화재 등은 없었고 2004년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다.  ‘딜쿠샤’ 역시 1923년에 앨버트 & 메리 테일러 부부가 건축을 시작하여 1924년에 입주하였고, 19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에 재건하여 1942년 미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선교교육원과 딜쿠샤는 현재 서대문사거리에서 독립문으로 가는 통일로를 중심으로 길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딜쿠샤를 짓기 전 테일러 부부의 신혼집은 선교교육원과 가까운 충정로에 있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선교사를 비롯하여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인것  같다.

딜쿠샤 라는 건축물이 100년이라는 시간을 견디는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건축주였던 앨버트 & 메리 테일러 부부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보았다. 

1923년 건축된 딜쿠샤라는 이름의 주택. 2017년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고, 2년간 복원공사를 거쳐 2021년 개관되어 무료로 관람되고 있다.


나, 브루스 테일러는 1919년 2월28일 한국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 병원은 나의 할아버지 알렉산더 테일러가 돌아가셨던 곳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난 날은 당시 조선 고종황제의 장례식이 있던 기간이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문상객들에게  뿌려질 ‘대한독립선언서’가 제작되어 배포되기 직전의 날이기도 했다.

나의 엄마인 메리 테일러는 병원 내의 분위기가 이상했다고 한다. 간호원들이 급히 숨긴 선언서 뭉치(4천여장)가 엄마의 침대 아래에 있었다.  갓태어난 아들을 보기 위해 온 아버지 앨버트는 AP통신 기자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한국어를 잘 알고 있어 그 선언서의 내용을 보고 급히 기사를 썼고, 선언서와 기사를 동생 윌리엄에게 맡겨 일본으로 가서 미국으로 타전하게 하였다. 윌리엄 삼촌은 그 기사를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 도쿄로 가서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고, 독립선언서가 국외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기사는 1919년 3월13일자 [뉴욕타임즈]에 “서울. 3월12일(AP Associated Press) - 한국의 독립선언서에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말하다”라는 내용으로 보도되었다. 이 보도 외에 아버지 앨버트는 제암리 학살사건과 독립운동가들의 재판 등을 취재하여 기사화했다. 

 1919년 내가 태어난 당시에 우리는 서대문에 살고 있었다. 당시 주소는 ‘죽첨정 2정목 187번지’(현재 주소로는 서대문구 충정로7길 부근)였고 ‘작은 회색집(the Little Gray Home)’이라 이름지은 한옥 형태였다. 부모님은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가 있는 넓은 땅을 발견하였다. 

딜쿠샤 앞에 있는 은행나무. 현재 수령 490년 추정. 권율장군의 집터에 있던 은행나무 라고 설명이 되어있다.


이곳은 예전부터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이었고, 그곳에 있는 큰 은행나무에 마음을 뺏긴 엄마가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했다. 은행나무가 있는 땅의 주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앨버트는 바로 그 땅을 매입하여 집을 지었다. 엄마 메리는 자신들의 집에 ‘딜쿠샤(기쁜마음의 궁전 DILKUSHA)’라는 이름을 붙였다.

딜쿠샤는 엄마가 인도에서 방문했던 러크나우 궁전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언젠가 자신에게도 집이 생긴다면 이 이름을 붙이겠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1923년에 착공하여 1924년에 완공된 딜쿠샤의 정초석에는 DILKUSHA 1923 이라고 새겨져 있다. 

1924년 완공된 딜쿠샤로 이사갔을 때 나는 5살이었고, 1926년에 벼락으로 인한 화재가 났다. 1930년 11살때 재건되어 그때부터 10년간 살았다. 1940년경 나는 미국으로 갔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한국에 거주하던 적국 국민들을 수용소에 구금했다. 아버지도 1941년 12월 일본군에 끌려가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어머니가 쓴 자서전 [호박목걸이]에는 “형무소와 그 근처에 빨간 벽돌로 된 높은 건물이 보였다. 거기서 줄지어 걷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측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수와 일치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딜쿠샤에서 서대문형무소가 보였다. 1942년 5월 아버지는 풀려났지만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딜쿠샤에서 14~5년간을 살았다. 

딜쿠샤 내에 전시되어 있는 호박목걸이와 귀걸이. 앨버트가 메리에게 약혼선물했던 것으로 손녀인 제니퍼가 2017년에 집안유품들과 함께 기증하였다.
연극배우였던 메리는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국인들의 얼굴을 잘 그렸다.


부모님은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배를 타고 약 두 달 만에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도착했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난 이후 아버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던 남편을 위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해를 들고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했다. 일제가 추방한 지 6년 만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유해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되었다. 어머니는 한국을 떠나기 전 딜쿠샤를 방문했다.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어려을 때 살았던 은행나무가 있던 집이 간혹 생각났다.  세월은 흘러 2005년, 86세의 나는 한국에서 살았던 딜쿠샤를 찾아달라고 의뢰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지명만으로 집의 위치를 가늠해야 했기 때문에 딜쿠샤를 찾는 데 2개월이 걸렸다. 나는 아내 조이스 핍스와 딸 제니퍼와 함께 2006년 딜쿠샤를 방문하여 이곳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살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1940년 한국을 떠난 지 66년 만의 귀향이었다. 나는 딜쿠샤가 보존되어 집이 없는 주민들의 안식처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2015년 나는 96세로 사망했지만 나의 딸이 우리가족이 간직하고 있던 유품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서울시는 2016년 업무협약을 맺고 2017년 등록문화재로 등재하고 2017~18년에 학술용역연구를 맡겨 착수하였고 2018년에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과 합의하여 이사시킨 후, 2018년 11월부터 2년에 걸쳐 복원공사를 완료하고 2021년 3월에 시민들에게 공개 개관하였다. 

딜쿠샤의 내부. 테일러 가족이 가지고 있던 사진자료를 근거하여 가구 등을.구입하여 복원해 놓았다.

정초석에 새겨진 DILKUSHA 1923


미국인이었던 내가 1919년 한국에서 태어나 12년여간 살았던 딜쿠샤는 한국의 격동기를 거쳐 백여 년의 시간을 견디며 2021년 하우스뮤지엄으로 거듭났다. 정초석에 딜쿠샤 1923 이라는 이름과 함께 있는 시편 127편 1절이라는 숫자가 새겨져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고 집 지은 자의 후손인 나와 나의 딸이 딜쿠샤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였다, 라고 해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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