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백제유적 익산 일대 답사
2021.3.23 화
9시 30분 출발
유성 기준 ㅡ익산 왕궁리 유적 / 63km(한시간 이내)
* 왕궁리 유적 5층석탑에서 만남
11시 출발
익산 쌍릉
13시30분
국립익산박물관 및 미륵사지
답사 전 날 자료를 보면서 익산의 백제문화재에 대한 전체의 틀거리를 생각해보았다. 익산은 백제 말기, 무왕과 뗄 수 없는 지역이다. 무왕 재위 시절(600~641) 왕궁과 미륵사지를 건축하였고 무왕과 왕비의 무덤인 쌍릉이 있는 곳. 무왕은 4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왕으로 있었다. 어쩌면 가장 영광스러운 기간이었을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왕궁과 미래불을 모시는 미륵사를 건립하였다.
당시 규모로 제일 크고, 최고의 건축술을 도입하였던 것으로 보아 백제 600년 기간 동안 어쩌면 가장 강성한 시기였을 수 있다. 그러나 무리한 재정투입으로 세력이 약화되어가는 상태에서 의자왕이 왕권을 이어 받으면서 세력이 급격히 하락해 버린다. 그 결과 나당 동맹으로 인한 전투에서 깡그리 몰락한다. 도성은 완전히 불타버리고 왕족과 귀족들은 일본으로 간다. 소위 백제의 정치경제문화가 급속하게 일본으로 넘어가버리고, 어쩌면 그 시기 이후 일본은 크게 부흥하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지 예측하게 한다.
왕궁리, 고도리 등의 지명만 남아 그 흔적으로 보여주었는데, 남아있었던 것은 석탑 뿐이었고 황토에 천년 넘게 묻혀있는 것들을 발굴해 냄으로써 지명의 의미를 드러내 주었다. 박물관에서 전시되어 있는 유물 하나하나 발굴하는 과정은 흥분된 노력의 결과였을까. 신라 중심으로 유물 발굴이 있었고 백제는 잊혀진 왕국으로 있었데, 백제를 살려내려는 역사학사자들의 노력을 생각하면 좀더 주의깊게 보아야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체력은 떨어지고 있었다. 박물관 내 커피집에서 모처럼의 수다로 활기를 띠었고, 마무리 여력으로 미륵사지를 둘러보았다. 미륵사지는 광활했다. 이 곳을 가득 채웠을 건축이 상상이 안될 정도로 넓었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면서 금제사리봉안기에서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639년에 창건하였음이 밝혀졌음에도 박물관 영상물에 여전히 선화공주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후대 신라에 의해 만들어졌음직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전설이 약화되지 않고 있다.
앞으로 다가불 미래불인 미륵불을 기다리고자 했던 백제의 문화적 조급함을 좀더 마음에 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반성이 된다.
미륵불이 유달리 많은 백제권역. 미륵사, 금산사, 관촉사, 법주사 까지. 서기 600년 7세기는 백제와 고구려는 세기말에 해당했고, 가야는 좀 더 이르게 6세기가 세기말이었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으면서 재도약하여 통일신라로 확장, 천년 왕국을 이어갔다.
곧 이어 공주, 부여 답사를 통해 그 문화를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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