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깊이 나아가고 스스로 체득한다

이춘아 2025. 5. 11. 07:48

위잉스, [위잉스 회고록](이원석 옮김), 마르코폴로, 2023.


(185~189쪽)
쳰(첸무 錢穆 1895~1990) 선생님은 내 지도교수였으나 내게 어떤 연구 제목도 주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제목과 논지를 정한 다음에 그 분과 논의해야 했다. 이것 역시 “깊이 나아가고 스스로 체득한다.”라는 맹자 원칙의 실천이었다. 

당시 나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도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방향은 중국 사회경제사로 기울었다. 20세기 전반 중국과 일본의 사학계는 위진남북조 시기를 아주 활발하게 연구하여 매우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나는 문벌 사회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유가와 도가의 상호 투쟁과 문벌의 관계를 추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를 경험적으로 검토해 보는 작업에 대략 상응했다. 

쳰 선생님은 내 구상을 알게 된 후 공감과 긍정의 태도를 보여주었으나, 곧바로 극히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다. 곧 내 전체 계획은 반드시 한대(漢代)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근원의 소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 가르침을 받고 나는 본래 연구계획을 수정했다. 원래 준비했던 계획은, 먼저 [삼국지] 열독부터 시작하고 최종으로는 [후한서]를 정사 정독의 시점으로 삼는 것이었다. 

'정독’은 두 가지 사항을 포함했다. 첫째, 처음부터 끝까지 책 전체를 통독하는 것이며, 둘째, 책에 있는 모든 관련 자료를 체계있게 정리하고 기록함으로써 향후의 조사와 운용에 도움이 되게끔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항에 관해 조금 더 설명해야겠다. 연구 취지에 상응하여, 사회 경제 정치 사상 각 분야에 관한 [후한서]의 모든 언급을 수집하되, 그것이 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아니면 중대하건 대수롭지 않건 간에 모두 하나하나 수집해서 카드에 정리하고 표지를 달아, 이후 분야별로 검토할 때 사용하려 했다. 비교적 간단한 원문은 다 베낄 수 있었으나 좀 긴 것은 요점을 적었다. 그러나 원문 내의 핵심어휘나 경구는 최대한 카드에 다 남기려 했다. 

정독 작업은 [후한서]에서 시작하여 위로는 [한서]로 거슬러 올라갔고 아래로는 [삼국지]까지 이르렀다. 작성한 카드는 1천여 장을 헤아렸고 그것은 내 중국사 연구의 기초를 놓아주었다. 거의 2년에 이르는 정독과 기록을 거쳐 1955년 늦봄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논문의 최초 제목은 ‘전 후한 교체기 정치변동의 사회적 배경’이었으며 1956년 1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탈고한 후에는 제목을 ‘동한 정권의 건립과 사족 대성의 관계’로 정했다. 

이것은 내가 저술한 첫 번째 사학 논문으로 전문은 약 6만자 였고 1956년에 출판된 [신아학보]는 쳰 선생님의 65세 기념호였는데, 나는 또 카드에 수록된 1차 사료에서 출발하여 10만자에 이르는 논문 [한 진 교체기 사의 새로운 자각과 신사조]를 썼다. 그뿐 아니라, 1958년 가을에는 하버드 대학 양롄성 선생님의 ’중국경제사연구‘반에서 [한대의 국제경제적 교류]를 영어로 썼는데, 역시 카드 자료에서 전통적 문헌 증거를 찾은 다음 국내외 고고학계에서 발굴한 자료를 널리 참고하였다. 

 내가 특별히 중시했던 것은 한나라 왕조와 외족 사이의 경제적 교섭 배후에 있는 제도적 구조, 특히 “조공” 체제였다. 그것은 [한서]와 [후한서] 중 관련된 서술을 모아서 여러 층위에 걸쳐 분석과 종합을 해낸 후에 비로소 정확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원래 갖고 있던 카드가 그 글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몇 년 후 이 논문을 연구 저서로 확장했으니 이 책이 바로 [한대 중국의 무역과 확장(1967)]이었다. 

이상, 사학 연구의 초기 경력과 성과를 돌아보았는데, 1953~55년 사이 만 2년 동안 쳰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한대 사서를 정독했던 것이 이후의 내 학문 인생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독자는 즉각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195~197쪽)
2008년에 나는 탕 선생님의 동상을 위해 찬을 써서 가장 정확하고 간단한 방식으로 그 분의 일생과 학문을 요약하였다. 이 짧은 글을 아래에 기록하고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탕쥔이 선생(1909~1978)은 쓰촨 이빈 사람으로, 어릴 때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유가 전적을 통해 지혜를 깨우쳐 나갔다. 자라나서 남북으로 유학을 다니다가 어우양졘, 슝스리 등 대가에게 배워 마침내 유가와 불교의 허물을 꿰뚫었다. 선생의 정밀한 사유과 명쾌한 분석력은 천부적이어서 처음에 서양철학 이론을 배울 때 천성에 매우 잘 맞았다. 조예가 깊어 독일의 변증법적 사유를 묵묵히 이해해 내는 경우가 많았다. 일평생 중국 인문 정신의 진작을 임무로 삼아 구학문과 신학문을 하나의 화로에서 용해하고, 한 단계 한 단계 체계 있게 구축해 나가서, 경계가 트임과 동시에 위계가 조밀하였다. 도덕적 자아의 정립이 그 기초였고, 중국문화의 정신적 가치가 그 전모를 드러냈으며, 영혼의 아홉 번째 경지인 천덕이 흘러나오는 경지는 궁극적 귀의처였다. 이것이 바로 선생님의 학문이 나이가 들수록 원숙해졌다는 것에 대한 명확한 증거이다. 

1949년, 선생은 신아서원의 창건에 참여하였고 철학과를 창설하였으며, 1974년 중원 대학 석좌교수직에서 퇴임할 때까지 25년 동안 홍콩의 철학계를 주도했다. … 수많은 학자가 문하에서 배출되어 일세를 풍미했다. 시국이 어수선하고 중국 문화가 쇠락하였으나 그래도 신주의 철리가 해안 한 귀퉁이(홍콩)에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에는 선생의 공이 막대했다. 

선생은 강학할 때도 늘 정세를 염두에 두었으니, 몸소 세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현실을 깊이 걱정했다. 그리하여 분연히 근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경지를 열었으며, 공자의 가르침을 견지하고 천하에서 주창했으니 이것이 바로 국내 외의 신류가 발흥한 연유이다. 신유가의 종지와 규모는 선생이 찬술한 문화선언으로 정해졌다. 수십 년 동안 국내 외에 전해지면서 점차 세계의 운명과 호흡을 같이 했으니 참으로 탁월하지 않은가!

도를 밝히고 세상을 구제하면서 위로는 선철을 계승하였고, 진실한 그의 어짊은 후대를 위해 모범이 되었다. 동상을 우러러보며 영원히 기억하고 잊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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