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24(2014초판).
(112~116쪽)
그해 나는 스물세살의 교대 복학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내가 소회의실의 조원들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그 밤 도청에 남은 사람들이 그만큼 오합지졸이었다는 걸 뜻합니다.
우리 조의 절반 이상이 미성년자였습니다. 장전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정말 총알이 나간다는게 믿기지 않아, 도청 앞마당에 나가 밤하늘을 향해 한발 쏘아보고 돌아온 야학생도 있었습니다. 스무살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집으로 보낸다는 지도부의 지침을 거부한 건 바로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의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만 17세까지만이라도 억지로 돌려보내는 일에 긴 언쟁과 설득이 필요했습니다.
상황실장으로부터 내가 지시받은 작전은 실상 작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계엄군이 도청에 다다를 것으로 예상된 시각은 새벽 두시였고, 우리는 한시 삼십분부터 이층 복도로 나가 있었습니다. 성인 한사람이 창문 하나씩을 맡았습니다. 미성년자들은 창과 창 사이에 엎드려 대기하다가 옆에 있던 사람이 총에 맞으면 그 자리를 맡기로 했습니다. 다른 조들이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인 작전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상황실장은 우리 목표가 버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만, 수십만의 시민이 분수대 앞으로 모일 때까지만.
지금은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그 말을 절반은 믿었습니다. 죽을 수 있지만, 어쩌면 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겠지만, 어쩌면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뿐 아니라 조원들 대부분이, 특히 어린 친구들은 더 강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도부를 이끌었던 대변인이 전날 외신기자들을 만나 했다는 말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패배할 거라고 그는 말했다지요. 반드시 죽을 것이며,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지요. 고백하건대 나에게 그런 초연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김진수의 생각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리라고 예상하면서도 도청 밖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왔던 걸까요. 아니면 나처럼, 죽을 수도 있지만 살 수도 있다는 생각, 어쩌면 도청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생 동안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낙관에 몸을 실었던 걸까요.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도청 앞 스피커에서 연주곡으로 흘러나온 애국가에 맞춰 군인들이 발포한 건 오후 한시경이었습니다. 시위 대열 중간에 서 있던 나는 달아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산산조각나 흩어졌습니다. 총소리는 광장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높은 건물마다 저격수가 배치돼 있었습니다. 옆에서,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는 사람들을 버려둔 채 나는 계속 달렸습니다. 광장에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됐을 때 멈췄습니다. 허파가 터질 듯 숨이 찼습니다. 땀과 눈물에 얼굴이 흠뻑 젖은 채 셔터가 내려진 상점 앞 계단에 주저앉았습니다. 나보다 강한 몇몇 사람이 다시 거리 가운데 모여, 예비군 훈련소에 가서 총을 가져오자고 의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만있으면 다 죽어요. 우릴 다 쏴 죽일 거란 말이오. 우리 동네에는 집에까지 공수들이 들어왔소. 무서워서 나는 머리맡에 식칼을 두고 잤소. 말이 됩니까, 저쪽은 총이 있는데, 수백발을 저렇게 백주 대낮에 쏘는데!
그들 중 하나가 자신의 트럭을 몰고 돌아올 때까지 그 계단에 앉아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총을 들 수 있는지,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군인들이 가진 수천정의 총이 수십만의 사람들을 살해할 수 있다는 것, 쇠가 몸을 뚫으면 사람이 쓰러진다는 것, 더웠던 몸들이 차가워진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함께 올라탄 트럭이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두차례 길을 잘못 들었고, 겨우 도착한 예비군 훈련소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총을 가져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가전에서 희생되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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