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칼럼

좀 치사한 여자

이춘아 2019. 8. 7. 07:01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제게 편지를 주셨습니다.

--먼저 '이춘아 문화유산해설사'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내가 아직도 이 세상에서 제일 해보고 싶은 것이 '관광안내원'입니다. 觀光이란 주역의 ‘觀國之光'이란 말에서 나온거죠. 관광이 그저 놀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내면의 빛'을 보러다니는 순례라고 새길 수 있겠죠. '觀'이라는 글자가 본래 눈(目)으로 보는 게 아니니까. 그 안내원이라!. 빛나는 해설아래 서 있고 싶습니다. 다만 해설사가 다 해설해버리면 나는 뭘 해야 하나요? 상상력과 참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운만 띄워주는 해설사, 바로 그대이기를 빕니다.---

참 큰 과제입니다. 어떻게하면 상상력과 참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아직은 무엇이든 남이야 알아듣든 말든 내가 외운 것을 설명하는 것도 급급하게 여기고 있는데.

오늘 새벽에 쓴 글 한편 첨부합니다.

2001년 10월 12일

좀 치사한 여자

아침 설거지를 하고 있는 중에 일어난 모자간의 대화. “엄마, 가방에 있는 껌 하나 가져가도 돼요?” “안된다. 나도 하나밖에 없다” “와아 치사하다” “그래 난 원래 좀 치사한 여자다 몰랐냐.” 껌을 주지 않는 것으로 일단락이 나긴 했지만 말을 하고 나니 참 약간은 우습게도 내가 정말 치사한 여자임을 확인한 셈입니다. 껌 하나 달라는 아이의 말을 거절하는 순간 내 마음에 일어났던 동요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이가 양치질을 하지 않고 껌으로 떼우고 학교에 가려한다는데 대한 반감, 또 하나는 내 가방에 껌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마저 없으면 껌 사러 가는 것이 귀찮다는 것, 마지막 하나는 대단히 소중한 것과는 상관없이 비록 껌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거절하는데 까지 일초도 안 되는 시간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람의 사고구조도 놀랍습니다. 한 친구가 길을 가다가 넘어져 땅바닥에 도달하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넘어져서 자신이 죽었는데 누구누구가 문상을 왔고 누구누구가 슬피 울더라고. 어쩌면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자신이 놀라웠다고.

아이에게 껌을 주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무래도 아이의 양치상태를 걱정하는 마음은 가장 뒷 번호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귀찮아하고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내 삶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치사해질 때가 생각보다 자주 있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교회 어린이들이 크리스마스 철이 되어 연극을 하게 되면 가장 자주 하는 소재가 ‘마구간에서 예수 탄생하시다’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주제이기도 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왜 어린이 시절부터 극화하기 좋은 주제가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저처럼 껌 하나에도 치사해지는 순간을 대비하여 어린이 시절부터 귀감으로 여기게 하여 평생을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려서 했던 생각으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지나간 사람들은 참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이가 들수록 새록새록 느껴집니다.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비록 껌 하나’에 치사해졌다고 하지만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껌이란 환상에 가까운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시골에 살았는데 누가 밀알을 꼭꼭 싶으면 껌이 된다고 하여 몇 시간이나 밀알을 씹었지만 내가 느꼈던 그 환상의 껌이 되기는커녕 물컹한 상태에 밀 껍질이 입안에 맴돌았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한참 어른이 된 이 마당에도 내 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루 종일 씹던 껌을 내일 또 씹을 요량으로 자기 전에 방벽에 붙여놓고 잠들었던 기억도 나서 그 말을 누구에게 했더니 자기는 요즘도 그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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