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사대부, 바다를 건너다

이춘아 2022. 4. 30. 07:01

남종영 손택수 외, [해서열전 - 97권의 책에서 건져 올린 바다 이야기], 글항아리, 2016.

김충수, ‘사대부, 바다를 건너다'

최부의 [표해록](서인범 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은 계획하고 예상한 일이 아니라 뜻하지 않게 일어나 맞닥뜨린 일에 대한 기록이어서 날것 그대로의 경험이 고스란하다. 무엇보다도 상상의 영역이었던 중국 강남을 현실의 공간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바다는 한 세상(삶)이 끝나는 동시에 저 너머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어름이다.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여태까지와 매우 다른, 목숨을 건, 낯선 곳에 대한 모험이며 미지에 대한 탐험이어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느닷없이 낯섦에 직면한 최부(崔溥, 1454년 ~ 1504년)의 경험은 더욱 값지다. 

[표해록]의 앞부분은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친다. 출항하자마자 폭풍우에 휩쓸려 망망대해를 표류하더니 곧이어 중국 해적들을 만난다. 그들은 창과 작두칼 등으로 금은보화를 내놓으라며 협박하면서 행장과 곡식을 비롯한 갖가지 물건을 모조리 강탈하고는 끔찍하게 폭행을 해댄다. 

수난은 계속되어서 중국 땅 닝보(영파)에 닿자마자 최부 일행은 왜구로 오인받아 중국 관리들에게 문초를 당한다. 거듭되는 환란으로 공포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침착하게 이끌고 하나하나 헤쳐나가는 최부의 모습은 세월호라는 해상 참변을 마주했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표해록]이 시시콜콜 기록함으로써 강남은 우리에게 비로소 현실세계로 다가오게 된다. 일찍이 중국이라고는 베이징만을 체험해봤던 사신들은 자초지종을 듣고 놀라며 부러워하고, 성종은 글로 써 올리라고 명한다. 함께 이야기한 사람의 이름과 인용한 책까지도 꼼꼼하게 서술할 정도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에 역사 또는 인문지리지로 읽을 때 영락제 시기 명나라의 맨얼굴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바다에 관한 세밀한 관찰,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금 역사와 문물 및 제도와 정책,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운하 주변의 풍경과 백성의 생활, 고사와 일화들이, 하나하나 헤아려 그 크기를 수치로 나타낸 다리와 교각들, 지루할 정도로 나열되는 지명과 함께 포진되어 있다.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했던 조선 지식인의 해박함을 중국인들은 공경해 마지않는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표해록]은 명나라 초기에 대한 인문지리서이기도 하다. 서구 학계에서 이 책을 당대 명나라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료로 평가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무엇보다도 최부의 이런 당당함은 그가 강남이라는 별세계를 발설하면서도 그 세계를 맹종하거나 찬탄 일변도로 바라보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일행 43명의 사연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만나는 중국 고한리며 선비들은 호기심을 잔뜩 드러낸다. 우리의 강남 인식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조선은 바다 너머 멀고 낯선 상상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표해록]은 이 충격적이었을 낯선 만남을 매우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사림으로서의 당당함은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나타난다. 중국 선비 노부용은 [중용]을 인용하며 천하가 하나의 법제로 통일되었는데 왜 중국와 말소리가 다른지 묻는다. 최부는 천 리만가도 풍속이 다르고 백 리만 가도 습속이 다른 법이라며, 당신에게 우리말이 괴상하게 들리는 것처럼 나도 당신의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 내려준 성품은 똑같은 것이어서, 나의 성품도 요와 순 임금, 공자와 안회의 성품과 같다고 대답한다. 최부는 글 곳곳에서 당당히 조선인임을 밝힌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양자는 평등한 위치에 서게 되고 조선과 중국의 역사 문화 또한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강북과 강남의 문화를 나란히 비교하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강북이 강남보다 수준 낮은 곳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역사와 환경에 의하여 형성된 차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야 할 테다. 

당당함은 주체성의 다른 표현이다. 숱한 독서와 자기 수양, 실천을 통해서 견고해진 주체성은 올곧은 신념과 의지로 이어진다. 43명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바다와 대륙을 가로질러 귀환할 수 있었던 것도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다 너머를 지향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인이 되는 길이다. 내 나라의 역사와 문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근본을 잃지 않는 데서 바다를 경영하고 저 너머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참다운 길이 열린다. 차이를 올바로 인식할 때에 배려와 이해, 존중이라는 인간에 대한 예의도 갖출 수 있다. 세계인이 코리아로 우리를 지칭한 지 이미 몇백 년이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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