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작가수첩 1](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9(초판 1998)
(25~28쪽)
1936년 1월
창문 저쪽의 정원, 내게 보이는 것은 그 담장들뿐이다. 그리고 빛이 흘러내리는 저 몇 개의 나뭇잎들, 더 높은 곳에도 또 나뭇잎들. 그보다 더 높은 곳에는 태양. 바깥 세상에서 느껴지는 저 모든 환희, 세상 전체에 퍼져 있는 모든 기쁨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하얀 커튼 위에서 노닐고 있는 나뭇잎들의 그림자뿐이다. 그리고 또한 방안에 마른 풀의 금빛 향기를 그윽하게 쏟아 붓고 있는 다섯 갈래의 햇빛. 미풍이 일면 그림자들이 커튼 위에서 생기있게 살아난다. 구름이 끼더니 다시 해가 나고 마침내 그늘로부터 이 미모사 꽃병의 노란 광채가 솟아오른다. 그것으로 족하다. 한 가닥 빛이 돋아나기만 해도 나는 금세 영문을 알 수 없도록 얼얼한 기쁨에 흠뻑 젖는 것이다.
동굴 속에 갇힌 수인처럼 이제 나는 혼자서 세상의 그림자와 마주하고 있다. 1월의 오후. 그러나 쌀쌀한 기운이 대기 속에 남아 있다. 도처에서 손톱으로 건드리면 그냥 부서질 듯한 얇은 햇빛의 막이 만물을 영원한 미소로 옷 입힌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뭇잎들과 햇빛의 유희 속으로 빠져드는 것밖에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 담배가 타들어가고 있는 이 햇살. 대기 속에 숨쉬고 있는 이 부드러움. 이 은근한 열정 그 자체가 되는 것. 내가 나 자신에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필시 이 빛의 저 한가운데서일 터이다. 이 세계의 비밀을 열어 보이는 이 미묘한 맛을 이해하고 음미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이 세상의 저 밑바닥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 다시 말해서 나를 무대장치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이 극도의 감동. 잠시 후면 또다른 사물들, 또다른 사람들이 나를 휘어잡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책갈피에 꽃잎을 끼워두듯이 나로 하여금 시간의 천에서 이순간을 오려낼 수 있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사랑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던 어느 날의 산책길을 그 꽃잎 속에 간직해둔다. 그리하여 나 또한 산책을 한다. 그러나 나를 쓰다듬는 것은 어떤 신이다. 진종일 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나더러 매우 활동적이란다. 오늘은 잠시 발길을 멈춘 정지다. 그리하여 내 가슴은 저 자신을 만나러 간다.
아직도 어떤 불안이 나를 사로잡는 것은 이 잡을 길없는 무형의 순간이 수은 방울들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하는 이들을 가만 놓아두라. 나는 나 자신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있기에 이젠 더 이상 불평이 없다. 나는 이 세계 속에서 행복하다. 나의 왕국은 이 세계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구름, 사라져가는 순간, 나 자신으로부터의 나의 죽음. 책을 펼치면 좋아하는 한 페이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오늘 이 세계라는 책에 비긴다면 그 페이지는 얼마나 김 빠진 것인가. 내가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 고통은 곧 이 태양이요, 이 그림자들이요, 이 열기요, 저기 아주 멀리, 대기 깊숙한 데서 느껴지는 쌀쌀한 기운이니 그 고통이 나를 도취시키게 하라. 하늘이 그 충만함을 쏟아 붓고 있는 이 창문에 모든 것이 다 쓰여 있는데 무엇인가가 죽는다. 인간들이 고통스러워하는가 하고 자문해서 무엇 하리. 중요한 것은 인간적이 되는 것, 단순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말할수 있고 또 잠시 후에 말하리라.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거기에 쓰여진다. 인간성도, 진실도. 그런데 내가 곧 이 세계일 때보다도 내가 더 진정하고 더 투명해지는 때란 언제일까?
기막힌 침묵의 순간. 인간들이 입을 다물고 조용하다. 그러나 세계의 노래가 솟아오르고 동굴 저 깊숙한 곳에 묶여 있던 나는 욕망하기도 전에 흡족해진다. 영원이 바로 여기 있는데 그걸 모르고 나는 원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내가 나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현존하는 것,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세계를 외면하고 지내는 줄 알지만 노란 먼지 속에서 솟아오르는 한 그루 올리브나무만 보아도, 아침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해변 모래밭만 보아도 마음속의 저항이 무너져버리는 것을 느낀다. 내 경우가 바로 그렇다.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의식하고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느낀다. 삶의 매순간은 그 속에 기적으로서의 가치와 영원한 젊음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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