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통사, [새로운 통찰을 모색하는 사람들 강연모음], 2022.
(353~369쪽 발췌)
김금순_백석을미 대표
‘할매들의 반란 - 협동조합의 진수’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로 와서 집을 짓고, 시골에서 살려면 마을 사람들한테 잘 보여야 되잖아요? 그래서 마을에서 회의를 한다고 하면 잘 참석했죠. 어느 날 부녀회를 한다고 모여라 그러더라고요. 갔더니 부녀회장을 뽑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냥 부녀회장을 뽑는구나 했는데, 아무도 부녀회장을 안 한다고 하고, 한 번 모이고 두 번 모여도 결국은 못 뽑더라고요. 세 번 정도 모여도 못 뽑으니까 결국 마을 총회 때 이장님이 저보고 좀 해주면 안 되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보녀회장이 뭐하는 건지도 모르고 부녀회장을 하게 되었어요. 저희 세대에는 반상회라는 건 있었지만 반별로 돌아가면서 반원이 모이는 게 다였죠.
저는 도시 생활을 해서 그렇게 농촌이 어려운 줄 정말 몰랐어요. 한 3천 평, 4천 평 논농사를 짓고 한 1천 평 정도 밭농사를 지어도 1년에 벌 수 있는 돈은 천만 원도 안돼요. 회비를 단돈 만 원이라도 걷어야 부녀회 운영을 할 텐데, 할머니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은 꼬깃꼬깃한 것이 아들, 딸이 왔을 때 용돈으로 준 정도 밖에 안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이걸 어떻게 할 건가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2010년 처음 부녀회장이 되어서 한 일은 혼자 사는 독거노인들이 돌아가셨나 안돌아가셨나 직접 방문하는 일이었어요. 그게 부녀회장의 일이예요. 제가 확인해 보니까 주기적으로 가야 되고, 봉사활동을 해야 돼요. 양로원에 가서 목욕도 시켜드려야 되고, 처음에는 회의만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청소도 해줘야 되고 마을 가꾸기에 풀도 깎아야 되고, 꽃밭도 매야 되고 재활용 청소쓰레기도 치우고. 제가 시골가서 적응하기 어려웠던 게 쓰레기 문제입니다. 아파트에서 평생 살았으니까 분리수거만 해서 내놓으면 끝이었죠. 시골은 분리수거해서 내놓을 데가 없어요. 처음에는 저도 어쩔 수 없이 차에다 싣고 아파트에 가서 버렸어요. 어디 버릴 데가 없었어요. 결국 건의를 했죠. 쓰레기 버릴 데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해결을 하라고 했더니 바로 다음 날 직원이 오더라고요. 시골사람들은 쓰레기 봉투를 활용도 안 하고 쓰레기봉투가 안되면 수거도 안 해가고 대책이 없어요. 그랬는데 한5년 지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지금은 오고 있어요. 그것도 대로변이나 회관 앞에 내 놓아야 하고, 저희 같은 경우는 공장 앞에 일주일에 한번씩 분리수거해 놓으면 싹 다 가져가고.
100세 인생인데 시골에서 할머니들이 아프면 서울로 올라가게 되잖아요. 어떻게 되겠어요? 어느 며느리가 같이 살라고 그래요. 노후에 대한 준비는 분명히 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할 수 있는 뭔가를 해야 되지 않느냐 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득 사업을 해야 권역사업을 재개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뭐를 할 거냐? 저희 마을에는 매실이 많습니다. 면장 한 분이 아이디어를 내서 매실이 돈이 될 거니까 서울에 있는 재경 당진 분들한테서 모금을 해서 매실나무를 저희 마을 남원천 왕복 10km에다 10만 그루를 심었습니다. 제가 내려왔을 때 제2회 매실 축제를 하고 있었어요. 돈이 될거라고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근데 그게 돈이 되겠습니까? 왜 안되냐 시장 분석을 하지 않고 사업을 하는거나 마찬가지죠. 머릿속에 매실 하면 어디가 떠오르세요. 광양 순천 그쪽이 워낙 많죠. 거기 매실이 다 시장에 나오고 일주일 있다가 당진의 매실이 익어요. 그러니까 시장성이 없는 거죠. 매실을 따서 액기스를 담거나 장아찌를 담는 등 별별 방법을 다 썼지만, 매실 액기스 동만 늘어날 뿐 판로가 없어 매실이 문제가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매실을 가지고 매실 한과를 시작하게 됩니다.
‘지역의 자원을 찾아라’ 문제는 20% 자부담을 내면, 정부가 80% 지원해준다니까 다 지원해 주는 줄 알았죠. 근데 그게 아니예요. 지원해 주는 거는 70평 공장 짓는데 80% 지원을 해주는 겁니다. 멋모르고 시작했죠. 처음에는 옛날처럼 방바닥에 말리고 한과를 만들었는데. 지금 그렇게 하면 식품허가가 안 나오죠.
아무튼 마을 땅 200평에 사업에 대한 상식도 없고 마을에 대한 상식도 없이 일을 시작해서 분란도 일어나고 찬반양론이 갈리기도 하며 어찌어찌 2011년도에 영농조합법인을 하고 한과 공장을 신축합니다. 새로 짓고 12년도 우수 마을기업으로 선정되고, 14년도에 농촌체험 휴양마을과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하고, 그러면서 조청 가공공장과 체험장을 하고, 상도 받게 되고 인증을 받게 됩니다. 그 다음에 직판장도 만들고 그다음에 HACCP도 받고 전통식품 인증도 받고, 또 지금은 전통장류 공장까지 지어서 10년 동안 땅을 2천 평을 마련했고 공장하고 체험장 사무실까지 해서 4개 건물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저의 개인적인 재산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들어 주세요. 저도 200만원만 출자했고, 저도 할머니들과 똑같이 최저 급여만 받고 똑같이 해요. 그래서 영농조합법인인데 협동체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현재 20명이 같이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데도 영농조합법이나 협동조합을 만들어 할머니들이 시골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은 많은데, 왜 저희가 더 유명해졌냐! 그건 다른 데는 남자들이 운영을 하고 할머니들은 그냥 고용인으로 근무를 하게 되는데, 저희는 직접 다 운영을 하고 여기서 다 결정을 합니다. 10년 동안 워낙 매스컴을 많이 타다 보니까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사시는 분들입니다. ‘같이’의 가치를 가장 중요히 여깁니다. 물론 함께 한다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충돌과 서로 간 문제가 끊임없이 생기지만, 그래도 서로 익숙하게 해결하면서 처리해 나가는거죠. 2012년도에 783개의 마을 기업을 행안부로부터 지정을 받았어요. 그중에서 우수마을 기업 여덟 군데 뽑는데 저희가 뽑혀서 동영상을 찍어줬어요. 그 동영상을 지금껏 10년 동안 계속 쓰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 사업을 처음 할 때는 마을 전체 다 할 줄 알았어요. 시골에서 하는 권역 사업이라고 들어 보셨나 모르겠어요. 농어촌지역개발 권역 사업이라고 70억 사업, 50억 사업 이런 얘기가 많이 돌죠. 저희 3개 마을을 합해서 30억 사업을 정부에서 지원하는데, 도농교류센터라고 하나 짓고는 중지된 상태가 있더라고요. ‘왜 그런가?’ 했더니 마을에서 공동체의 소득 사업을 하는 데가 나와야 이 사업을 진행할 수가 있으니까 이 사업을 저희보고 자꾸 하라는 거예요. 우리 이장님은 그 지원 받아 가지고 저온 저장고만 한 20평 지으면, 그 세만 받아도 충분이 이익이야 하시는 거예요. 시골에서 정부 지원책을 받아들이는 의식들이 그래요. 또 우리 노인회장님은 창고 지어서 세 주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요. 그 사업이 20% 자부담이고 80%로 정부 보조예요. 뭐 20퍼센트 가지고 밑지지는 않겠다고 생각을 했죠. 이름을 열심히 지었어요. 으뜸은 최고로 맛있는 한과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올미 ‘모두 한과 사러 오세요.’ 우리 식으로 해요. 이렇게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지은 이름이라서 백석올미 영농조합법인이 된 겁니다.
한과가 쉬운 것 같은데 민감합니다. 한과가 습기에 약해요. 그래서 조금 덜 마르면 튀겨지지 않아요. 기름만 먹어요. 또 너무 마르면 다 부서져버려요. 그냥 우리가 만들어 먹을 때는 맛있어서 이웃끼리 팔 때는 모양이 없어도 잘 나가요. 근데 상품화는 안되잖아요. 당시 한과 전문인 과정을 포천에서 7개월 코스로 가르치고 있더라고요. 1인당 수업료가 350만원도 비싸지만 당진에 포천으로 가려면 새벽 6시에 차를 몰고 포천 가면 하루종일 교육을 받고 집에 오면 밤10시. 7개월 동안 셋이서 다녔습니다. 마을에서 너네 망할 거야 그랬거든요. 망하지 않으려고 전문인 교육을 받아야 했어요. 포천에서 한과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과 사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을 다 배워오게 됩니다. 그 과정에 방바닥에 말리는 기술과 식품 건조기에 말리는 기술이 다릅니다. 온도도 맞춰야 되고 그래서 버려진 것이 1톤 트럭으로 한 대 분량은 될 것 같아요. 그런 실패를 거쳐서 오늘의 매실 한과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대기업 다녔던 남편의 도움으로 사업계획서를 써서 첫 해 5천만원을 받아 2012년도 추석에 건물이 준공이 되고 한과 판매는 우리 조합원들에게 판매 수수료를 10%씩 주기로 하고 시식용으로 3박스를 선투자해서 본인들이 사서 돌리고 후에 정산해주었어요. 자녀들에게는 10% 할인해 주기도 하고 자녀들이 사게해서 5천만원어치를 다 팔았습니다.
그걸 못 팔았으면 우리는 실패자가 되었을 거예요. 그걸 다 팔게되니 성공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거죠. 우리 할머니들이 자신감이 생긴거예요 5천만원어치를 파니까 우리 담당 공무원이 뭐라고 써서 올렸는지 ‘우수마을’로 선정됐다고 상으로 2천만 준다고 했어요. 현금으로는 안주고 탑차를 샀지요. 제가 자가용으로 배달을 하려니까 한과는 부피가 커서 실을 수가 없었거든요. 몇박스 실어도 금방 가득 차요. 그래서 탑차를 산거예요.
약속대로 10프로씩 나눠 갖고, 그 다음은 인건비를 지급했어요. 1년 동안 인건비 한 번도 안줬잖아요. 제일 많이 파신 할머니가 1500박스를 팔았어요. 우리 할머니들은 별 볼 일 없지만 할머니의 아들딸은 경찰서장도 있고 변호사도 있고, 어느 집 사위가 전국 지인들에게 선물로 한과로 하기도 하고. 1500박스에 10프로면 150만원. 돈을 지급할 테니 통장을 갖고 오라 했더니 33명의 할머니들이 통장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농협으로 모시고 가서 통장을 만들었어요. 제일 많이 타신 분은 230만원, 그 다음이 180만원, 150만원. 싹 나눠드렸죠. 2500박스가 택배로 나가려면 하루에 2~3백 박스씩 나갈거 아니예요. 트럭에 싣고 순성면을 한바퀴 휙 돌아 우체국 앞에 쌓아 놓는거예요. 오가는 사람들 보라고. ‘우리 이렇게 잘 되고 있어’ 홍보효과가 나는 거죠. 그랬더니 면 전체에 소문이 났어요.
우리가 맨날 뼈 바지게 일만 하고 보여 줄만한게 없었는데 마침 우리가 캐릭터를 개발했습니다. 정부 지원이 재미있는게 참 많아요. 홍보비만 지원을 합니다. 캐릭터를 만들고 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누룽지 할매에서 조청 할매, 고추장 할매, 장아찌 할매 등 다섯 할매가 나왔습니다. 이 할매 캐릭터를 하트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문화상품으로 판매를 합니다. 그 때는 한창 저희 마을에 찾아오시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분들을 상대로 한 시간 강의를 하고 물건도 사가지고 가세요. 그냥 가시는 분이 한분도 없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체험관은 만들었는데 체험을 운영할 줄 알아야죠. 근데 한과 체험과 약과 체험은 할수 있겠더라고요. 그건 우리가 교육을 받았으니까. 지금 체험지도사반은 못하는 게 없습니다. 오늘도 사과파이 체험하고, 매실 초콜릿도 만들고, 김장 체험도 했어요. 한과만들기 체험은 기본이고. 고추장 만들기 체험이 최고 인기가 좋습니다. 고추장을 만들어서 가져가거든요. 코로나가 오기 전에는 좋았어요. 1년에 1만2천명씩 체험객이 왔으니까. 외국인들도 한 해에 최소 3~4백씩 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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