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걷기 위한 길, 걸어야 할 길], 비아토르, 2020.
(14~ 19쪽)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고집쟁이 영감의 책을 읽었습니다. [나는 걷는다]라는 책 제목이 워낙 도발적이어서 손에 잡았는데, 책이 그려 내는 삶의 이야기가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에 이르는 1만 2천 킬로미터의 실크로드를 걸었습니다. 그것도 60세를 넘긴 나이에 말입니다. 무모한 여정이었습니다. 그가 직면했던 어려움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육체적 고통, 강도, 강도와 다를 바 없는 군인과 경찰들, 질병, 외로움, 그리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 무엇이 그를 그런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몰았다는 말은 적절치 않겠네요. 어떤 그리움이 그를 그 길로 소환했을까 묻는 것이 낫겠습니다. “인생의 세 번째 시기에 나는 느림과 침묵에 굶주려 있다”는 그의 고백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참 어려운 것은 채 무르익지도, 고이지도 않은 말들을 펴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줄 알면서도 침묵을 선택하지 못하는 부실한 제 믿음이 저를 괴롭힙니다.
며칠 전 한 절친한 후배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3박 4일 동안 침묵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함께 기도에 참여한 이들은 ‘눈길 안 주기’와 ‘손짓 안 하기’를 포함한 절대 침묵을 요구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끔 별들에, 산책길 꽃들에 말을 걸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를 들여다 보기보다 바깥을 향하도록 훈련받은 시선을 안으로 돌리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문자를 터득하고 나서는 절대로 문맹이 될 수 없는 원죄 같은 것 같았다나요.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말은 소음이라지요? 부질없는 말은 만남을 매개하기보다는 가로막을 때가 많습니다.
책과 서류, 우편물과 잡동사니로 가득 찬 제 사무실을 바라봅니다. 마치 제 내면의 풍경인 양 어지럽습니다. 날마다 날아오는 우편물을 어떤 것은 뜯어보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에 던지고, 어떤 것은 흘낏 한번 보고는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던지는 제 행동을 지켜봅니다. 우편물은 늘어나지만, 소통과 만남은 줄어듭니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앞에서 마음은 경계경보를 발령하고, 불시에 찾아온 낯선 이를 일단 미심쩍은 눈길로 훑어보게 됩니다. 낯선 이에 대한 ‘환대’는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의 전제 조건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낯선 사람은 ‘한 소식’을 가지고 내 앞에 당도한 천사가 아니라 피하고 보아야 할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사람을 꺼리게 되는 모순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몸으로 그들 곁에 다가서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몸이 매개되지 않은 만남은 진실하기 어렵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몸을 만짐으로써 그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몸이 가지 않는 곳에 마음이 가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마음이 바뀌려면 몸부터 회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배고픔과 목마름과 고통과 처절한 외로움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야 다른 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몸이 따르지 않는 관념은 우리 삶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몸을 매개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열병 앓는 시몬의 장모를 손을 잡아 일으키고, 한센병 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고, 앞 못 보는 삶의 눈을 어루만지셨습니다. 동료 인간들의 아픔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담긴 손길이야말로 살림의 손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버림받고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 곁에 선뜻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길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길의 사람은 제도와 관습, 사람들의 기대 속에 갇힐 수 없습니다. 그분은 늘 벗어납니다. 그렇기에 불온해 보입니다. 잘 닦인 길을 걷는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길이 된 사람의 운명은 평탄할 수 없습니다. 또 길 위에 선 사람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여행은 자기와 만나기 위한 여정이고, 자신과의 대면이기에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 요구 앞에 설 용기가 없는 사람, 자기의 취약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길을 떠날 수 없습니다. 키 큰 나무가 우듬지 끝까지 물을 공급하는 것을 삼투압의 원리로만 설명할 수 없다지요? 나무의 흔들림이야말로 물을 우듬지까지 끌어오리는 펌프질이라고 합니다. 나무를 흔들어 대는 바람은 고마운 바람인 거지요. 젊은 시절부터 저는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오규원 시인의 시를 읊조렸습니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의심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믿음이 독단이 되기 쉬운 것처럼, 일직선으로 달리는 이들이 보여 주는 경직성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나무는 흔들림 없이는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고 줄기도 높이 뻗을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 집을 짓는 까치처럼 우리도 흔들림 위에 있을때라야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위험이 두려워 길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넘어지기를 두려워하면 자전거를 배울 수 없습니다. 수영장 물을 마실 각오 없이는 수영을 배울 수 없습니다. 악의를 꺼리면 길을 떠날 수 없고, 특히 ‘그 길’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떠남은 비약이고 도약입니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난을 훔치다 (3) | 2024.09.19 |
---|---|
평범한 것들의 가슴 아픈 소박함 (2) | 2024.09.13 |
소로의 후예들 (17) | 2024.08.23 |
참깨 세 근 (25) | 2024.08.16 |
고독이 선율을 따라 흐르다 (27) | 2024.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