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불꽃], 자음과모음, 2006.
(97~107쪽)
<무희 최승희론>
가와바다 야스나리
일본일좌담회라는 것을 [모던 일본]이 개최했을 때, 여류 신진 무용가 중에 일본 제일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서양무용에는 최승희가 될 것이라고 나는 대답하였다.
그 좌담회는 신년 정월다운 분위기를 느끼고자 하는 애교에 불과한 것이었다. 진실한 비평회는 아니었다. 또한 한마디로 여류 신진 무용가라고 하더라도 십 대의 인물도 있고 삼십에 가까운 사람도 있다. 그 각각 세대는 무용의 경향이 서로 다르다.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는 것이다. 독립한 것이냐, 스승의 문하에 있는 것이냐 등의 여건에 따라서 그 평가도 동일하지 않다. 특히 비평의 표준이 혼잡한 우리 무용계에서 그 예술적 재능의 우열을 이것저것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를 들면, 한때 동일한 석정막 문하에 있었던 지금의 모양새로 말하더라도 석정 미도리의 우아하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우수한 것인지, 석정 미소자의 명랑하고 화려한 춤이 좋은 것인지, 최승희가 더 훌륭하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자가 다를 것이며, 더 머나먼 장래의 성과만이 그것을 심판해 줄 것으로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저 없이 최승희가 일본 제일이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에 족할만 것을 최승희는 갖추고 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을 일본 제일이라고 하기보다 최승희를 일본 제일이라고 말하기 쉬운 첫 번째 조건은 우선 그녀의 훌륭한 체구이다. 그녀의 무용은 선이 굵다. 그리고 힘이 넘친다. 그런데다가 한창 춤추기에 좋은 나이다. 또한 거기에 그녀의 독특한 민족적 냄새가 물씬 배어 있다.
최승희가 다시 일본에 와서 석정막 씨의 문하에 들어와서 출연한 첫 무대는, 영여계에서 주최한 여류무용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젊은 여류 무용가들이 거의 모였다. 최승희는 ‘에헤야 노아라’와 ‘엘레지’를 춤추었다. ‘에헤야 노아라’는 그가 일본에서 처음 추는 조선무용이었다.
그녀를 본 것이 처음이었던 그날, 여러 편의 무용 가운데 최승희의 무용은 나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었다. 무용비평가가 아닌 제멋대로의 구경꾼에 불과했던 나는, 그때의 감명으로 최승희의 무용을 더 보고 싶은 단순한 소원으로 그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모던 일본] 사장 마해송 군은 그녀와 동향이라는 이유로 잡지에서 주최하는 어떤 기회든지 최승희의 무용을 넣어 달라고 권하였다. 그런데 올해 가을 그의 은사 석정막 씨의 지원으로, 제1회 발표회가 개최되어 대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나로서는 숙원을 푼 느낌이어서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최승희에 관해서 무엇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 기회에 나의 부적절한 지위에 있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붓을 잡은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워했다. 나는 그의 무용 예술을 해설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없다. 생소한 나의 의견이 오히려 무용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어지럽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최승희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매우 적다. 공연장에서 최승희를 복도에서 만나면 그저 가볍게 인사나 할 정도의 친분만 있을 뿐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석정막무용연구소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지방 순회공연에 집을 지키고 있는 듯해 보였고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듯하여 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그러나 문예 잡지에서 무용가에 대한 것을 쓰라는 것은 매우 진기한 일인 까닭에, 최승희의 무용을 구경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늘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것이다. 요즘은 무용 공연이 음악회를 압도해서, 무용 전문잡지가 3,4종이나 발간되는 사정이라고는 하지만 서양무용은 아직 일반인들이 경시하는 경향이라서 요즈음의 무용가처럼 사회적으로 축복받지 못한 예술가는 없다. 오늘의 무용가는 모두 일종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평생 직업으로는 도저히 현실과 맞지 않는다. 저명한 무용가도 무대가 아닌 교수로서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까닭에, 무용의 활성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흥행계에서도 밀려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최승희는 파묻힌 보석이다. 타고난 신분이나 재능 있는 무용가가 적지는 않으나 활짝 피어나 성숙한 이후에도 사회적 배경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고, 애처롭게도 한창 일할 청춘을 허비하고 만다. 신극 배우나 음악가도 그렇지만 무용가 또한 험난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본문의 목적은 아니다. 석정막 씨와 최승희 자신의 말을 듣고 나서 이에 대한 정황을 말해 보고자 한다. 경성의 여학생인 최승희는 성악가로서 출세하려고 했다. 그녀는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년제의 여학교를 졸업하면 16세가 되는 까닭에 음악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연령이 모자라는 사정이 있었다. 그때에 공교롭게도 석정막 씨 일행이 경성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최승희의 오빠인 승일 씨는 예전부터 석정막 씨의 무용을 보고 크게 감명받은 바가 있었다. 최승희 자신은 학교에서 체육 댄스를 잘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무용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생애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 준것은 그의 오빠였다. 오빠인 최승일 씨는 그 당시 조선의 신진 작가였다. 북만철로호로군사령부 육군보병 중좌 이양 씨와도 친구 관계였다. 최승희의 발표회에는 때때로 상경 중에 이 중좌나 중본실언 씨가 함께 구경하러 왔었다. 문학가인 오빠도 최승희의 무용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승희가 오빠에게 이끌려 무용에 입문하겠다고 석정 씨를 찾아왔을 때는, 여학교를 졸업한 후 이 년째 되던 해였다. ‘흑백의 조선 여학생복을 입은’ 16세의 그녀는, 곧 석정막 씨와 함께 동경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기차의 차창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창에 대놓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러나 용산역을 지날 때 쯤 해서, 몰래 본 승희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기쁜 얼굴로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만 삼 년 동안 석정막 씨의 연구소에서 공부하였다. 물론 무대에도 선 적이 있었으나 나는 보지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석정소랑이 석정막 씨와 예술상에 관한 의견을 달리하여 연구소를 탈퇴하는 일이 생겼다. 최승희는 소랑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같이 하였다. 그 후 가정 사정도 있고 해서 경성으로 돌아가서 경서일보의 후원으로 연구소를 열고 발표회도 다섯 번이나 개최하였다. 조선의 유일한 무용가였다. 그런데 작년 봄에 또다시 석정막 씨의 연구소로 돌아왔다. “억지로 말한다면 나는 고향인 경성에 돌아와서 만 삼 년간, 처녀지에 밭을 갈며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그것이 내가 얻은 작고 귀한 성과겠지요.”라는 말이나 “내가 경성에 있었던 삼 년 동안은 인상 깊은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라고 그가 쓴 것처럼 이때의 귀국이 오늘날의 최승희를 형성한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황량해서 무용을 갖지 아니한 고향의 흙에‘ 서는 무용을 천하게 생각하는 조선에서 유일한 그의 무용이 어떠한 의미가 있었던가. 어떠한 고난을 맛보며 여기까지 왔는지는 멀리서 상상할 수밖에 없을 뿐이지만 그동안에 그녀는 고국의 전통을 지켜보면서 왔다. 민족을 보고 왔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 앞에 최승희의 예술이 선물로서 돌아온 것이다.
”무용이 궁핍한 조선, 그리고 자기들의 무용의 유산까지도 계승하여 발전하지 못하게 된 조선에 태어난 나는 이 황폐해진 고향 땅에 예술을 새롭게 재건하고 싶습니다. 궁핍한 조선의 무용을 재건해서 길러가는 것이, 나의 크나큰 즐거움인 동시에 에너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때에 나의 무용 작품은 들판에서는 큰 것이라고 하겠으나, 전체로서는 인간 생활의 어두운 면만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대해 새삼스럽게 놀랍니다. 무용도 그것이 다른 예술처럼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까닭에, 조선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감정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어두운 면을 자기의 작품에 구상화하려 한 것은 나로서는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무용은 슬픔과 괴로움과 성냄 같은 생활감정의 어두운 면을 표현하는 게 극히 적어서 ’기쁨’이라는 명랑한 측면만이 중요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무용이 조선 사람들의 생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이상, 즐거운 가운데 한줄기 애수가 서려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조선무용의 특수한 표현은 팔과 어깨이므로, 그중에서도 팔의 사용법은 극히 특수하고 우아한 표현이라야 합니다. 발을 떼는 데도 평범한 듯하나 발을 내딛는 것 등이 매우 우아하다는 것입니다.“
'조선무용에 대하여’와 [음악세계 9월호], '발표회에 관한 감상’에서 이러한 그의 말은 무엇보다도 그의 예술의 저류를 말해 주는 것이다. 나는 신무용 작품 중에서 ‘엘레지’, ‘인도인의 비애’, ‘황야를 가면서’, ‘폐허의 자취’ 등을 보았는데, 이러한 제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녀는 무대에서 한층 더 크게 보이는 체구를 말로써 더듬거리며, 주춤거리게도 하며, 부드럽게 말함으로써 극적이게 하고 거칠게도 하면서 강하고 기운찬 것을 표현한다.
어두운 것 같으나 약한 탄식은 아니다. 육체의 생활력을 최 여사처럼 무대에서 살리는 무용가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러나 미완성의 정령이다. 밝은 ‘희망을 안고’ 라든지, 조합된 ‘로망스의 전망’과 , 움직이는 시스템의 ‘습작’은 더군다나 시 작품이다.
그런데 ‘검무’, ‘에헤야 노아라’, ’승무‘ 등의 조선무용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통달하고, 자유롭고, 교묘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비평 같은 것은 그만두기로 하고,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일본의 서양무용가에게 민족 전통에 뿌리박은 강한 힘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그대로 춤추는 것은 아니다. 옛날 것을 새롭게 하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없어진 것을 다시 살려서 스스로 창작하는 것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다. 기생들이나 추는 춤이라고 하여, 최승희는 어느 누구로부터 조선무용을 배운 적이 없다. 눈으로 기억하였을 뿐이다. 걸작 ’에헤야 노아라‘와 같은 것은 일본의 ’갓보레‘와 같은 춤인데 술자리의 여흥으로 추는 춤에서 아버지의 그 춤을 보고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팔 년 전에 16세라면 그녀는 아직도 너무 젊다. 천혜의 체구와 재능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 [문예](1934)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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