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순 없다

이춘아 2024. 10. 22. 07:45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24~29쪽)
그리고 그 폭염의 밤, 아스팔트의 열풍을 맞으며 텅 빈 집으로 걸어 올라와 찬물 샤워를 하는 내가 있다. 밤마다 위아래 집과 옆집에서 에어컨을 켜기 때문에, 실외기들이 토해내는 뜨거운 바람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으려면 베란다 문과 창문들을 모두 닫아야 한다. 밀폐된 습식 사우나 같은 거실에서, 방금 끼얹은 냉수의 서늘함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책상 앞에 앉는다. 거기 올려놓은, 여전히 수신인이 정해지지 않은 유서를 봉투째 짖어버린다.

처음부터 다시 써.

그건 언제나 옳은 주문이다.
처음부터 나는 다시 쓴다.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비 오듯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다시 찬물 샤워를 하고 책상으로 돌아온다. 조금 전에 쓴 형편없는 것을 다시 찢어버린다.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물잔에 빠뜨린 각설탕처럼 내 사적인 삶이 막 부스러지기 시작하던 지난해의 여름, 이후의 진짜 작별들이 아직 전조에 불과했던 시기에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진눈깨비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눈 - 여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에 눈이 매워 계속할 수 없을 때마다 찬물로 몸을 씻었다. 책상으로 돌아와서는 방금 쓴 것을 다시 찢었다. 아직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편지를 남겨둔 채 끈끈한 몸으로 거실 바닥에 누웠을 때에는 파랗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은총처럼 기온이 조금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고, 정말로 막 잠들었다고 느꼈을 때 그 벌판에 눈이 내렸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멈추지 않고 내려온 것 같은 눈이.

아직 무사해.

거대하고 육중한 칼이 허공에서 나를 겨눈 것 같은 전율 속에서, 눈을 부릅뜸으로써 그 벌판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채 나는 생각했다. 비탈진 능선부터 산머리까지 심겨 있는 위쪽의 나무들은 무사하다. 밀물이 그곳까지 밀고 올라갈 순 없으니까. 그 나무들 뒤의 무덤들도 무사하다. 바다가 거기까지 차오를 리는 없으니까. 거기 묻힌 수백 사람의 흰 뼈들은 깨끗이, 서늘하게 말라 있다. 그것들까지 바다가 휩쓸어갈 순 없으니까. 밑동이 젖지도, 썩어들어지도 않은 검은 나무들이 눈을 맞으며 거기 서 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내리는 눈을.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무릎까지 퍼렇게 처오른 물을 가르며 걸어서,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등성이 끝까지. 거기, 가장 높은 곳에 박힌 나무들 위로 부스러지는 흰 결정들이 보일 때까지.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그러나 여전히 깊이 잠들지 못한다.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
여전히 숨을 짧게 쉰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못 견뎌했던 방식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

압도적인 성량으로 끊임없이 세계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던 여름이 갔다. 더이상 매 순간 땀 흘리지 않아도 된다. 온몸에 힘을 빼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열사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수없이 찬물 샤워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세계와 나 사이에 소슬한 경계가 생긴다. 긴소매 셔츠에 청바지를 꺼내 입고, 증기 같은 열풍이 더이상 불어오지 않는 도로변을 걸어 나는 식당에 간다. 여전히 요리를 할 수 없다. 한끼 이상의 식사를 할 수도 없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함께 먹었던 기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칙들이 돌아온다.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전화를 받지 않지만, 다시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체크하고 문자메시지를 확인한다.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쓴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모두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차츰 밤이 길어진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려간다. 이사한 뒤 처음으로 아파트 뒤편 산책로에 들어선 11월 초순, 키 큰 단풍나무들이 타는 듯 붉게 물들어 햇빛에 빛나고 있다. 아름답지만, 그걸 느낄 수 있는 내 안의 전극이 죽었거나 거의 끊어졌다. 어느 아침 반쯤 언 땅에 첫서리가 내리고, 그걸 밟는 내 운동화 바닥에서 부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아이들의 얼굴만한 낙엽들이 세찬 바람에 구르며 날아가고, 갑자기 헐벗은 플라타너스 줄기들은 버즘나무라는 한국어 이름처럼 희끗한 살갗이 함부로 벗겨진 것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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