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재 임재근 정성일,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도서출판 문화의힘, 2024.
(163~ 171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1묘역 313호에는 ‘한국의 잔 다르크’, ‘조자룡 같은 담력’으로 불렸던 정정화 지사가 잠들어 있습니다. 지사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섯 차례나 식민지 조선땅에 들어와 독립운동자금을 모았습니다.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는 임정 어른들을 손수 모시며 살림을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1920년 1월 정정화 지사는 중대한 결심을 하는데요. 상해로 건너간 시아버지(김가진)와 남편(김의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마음먹습니다. 뜻을 세운 지사는 친정아버지를 찾아가 결의를 밝힙니다.
“아버님, 제가 상해에 가서 시아버님을 모시면 어떨까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텐데 네가 해낼 수 있을까?”
“여태껏 겪은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어러 번 생각 끝에 결심하고 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네 시아버님께서 여생을 편히 지내시고자 해서 상해로 가신 건 결코 아니다. 상해 생활은 여기와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독립운동은 둘째치고서라도 우선 먹는 것 입는 것에서부터 어려움이 클 것이다. 더구나 위험한 곳이다. 생활이 힘들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너를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섣불리 먹은 마음이 중도에 유야무야될 까 봐 그것이 근심스러워 이르는 말이다.”
친정아버지 승낙을 얻은 후 지사는 북쪽으로 밤새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렇게 장장 26년간 망명 생활을 시작합니다.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은 경제적으로 늘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그저 하루 먹고 하루 먹고 하면서 간신히 꾸려가는 형편이었는데요. 주먹덩이 밥에 최소한 반찬 한두 가지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배추류를 소금과 고춧가루 범벅에 절여 놨다 먹곤 했습니다.
식생활이 이런 형편이었으니 구두나 운동화는 엄두도 못 내는 처지였는데요. 헝겊 조각을 몇 겹씩 겹쳐서 발 모양을 내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실로 누벼 신는 헝겊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은 여기저기 다니시는 곳이 많았는데요. 헝겊신 바닥이 남아나는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닥이 다 헤져 너덜거리기 일쑤였는데요. 바닥이 헤져버리니 신발 목부분만 발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꼴이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정정화 지사는 또 하나 새로운 결심을 하는데요. 국내에 거사 돈을 구해오겠다는 발상이었습니다. 지사는 당시 임시정부 법무총장이었던 신규식 선생을 찾아가 이야기하는데요.
“엉뚱한 소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친정에 가서 돈을 좀 얻어와볼까 하는데요.”
“부인, 지금 국내는 사지나 다름없습니다. 특히 김가진 선생의 일로 해서 시댁은 왜놈들의 눈총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조심해서 처신하겠지만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만에 하나 왜놈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이면 다시는 못 나올 것은 고사하고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겁이 없었던 정정화 지사는 그렇게 임시정부가 주는 지시를 받아 비밀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상해를 출발해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한 후, 비밀 편지를 전하며 여러 인사를 접촉해 독립 자금을 조달해 오는 중차대한 임무였습니다.
당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지에 백반 물로 글을 쓴 비밀편지를 이용했는데요. 그냥 보기에는 아무 내용도 없어 보였지만, 불에 편지를 쪼이고 나면 글씨가 또렷하게 살아나는 원리였습니다. 이후에는 끈 편지도 등장하는데요. 종이에 직접 글을 쓴 다음 종이를 노끈 꼬듯이 꼬아서 물건을 묶는 식이었습니다. 적이 보기에는 물건 묶는 끈이었지만, 펼쳐보면 비밀 내용이 적힌 편지였습니다.
정정화 지사는 임시정부가 구축해 둔 연통제와 교통국을 이용하여 국내로 잠입했는데요. 연통제는 임시정부가 구축한 국내외 연락을 위한 비밀행정조직이었고, 교통국 역시 임시정부 독립자금 수합을 위한 비밀 통신 기구였습니다.
상해에서 단동까지는 아일랜드인 조지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의 배를 이용했습니다. 조시 쇼의 고향 아일랜드도 영국에게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조선인의 독립운동에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이륭양행 2층에 교통국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가 이동과 자금 수송을 시도하곤 했습니다.
단동에서 신의주로 넘어갈 때는 독립운동가 최석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최석순은 일본 형사로 있으면서 신분을 위장한 독립운동가였는데요. 정정화 지사는 최석순의 누이동생으로 가장하고 압록강 철교를 건넜습니다.
신의주에 넘어와서는 역시 비밀 연락소인 세창양복점을 찾아가는데요. 양복점 주인이자 재단사였던 이세창 지사는 정의감에 불타는 조선인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세도가와 집권자에게 억눌려 살던 백성들이 이제는 조국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애국자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국내로 잠입한 지사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은 다음 다시 국내를 빠져나가고자 했는데요. 신의주에서 단동으로 빠져나가는 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철교를 건널 수 없어서 밤이 되길 기다려 배를 타고 강을 거너기로 하고, 몰래 강가로 나온 지사는 신발을 벗어들고 강변을 따라 맨발로 삼십리 길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세 시간쯤 걸어갔을 때 미리 기다리던 쪽배를 만났는데요. 한밤중에 사방에서 부는 강바람 소리가 지사를 움츠러들게도 했지만 무사히 강을 건너갔습니다.
상해로 돌아온 정정화 지사를 보며 모든 사람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지사를 칭찬했습니다. 아무런 탈 없이 돌아온 성취도 큰일이지만, 여자 몸으로 혼자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데 놀라워했습니다. 정정화 지사의 모험은 상해 조선인 사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장이 컸습니다.
1921년 늦은 봄 지사는 두 번째 파견 임무까지 성공합니다. 1922년 6월에 지사는 3차 국내 잠입을 결심하는데요. 하지만 그 사이 정세가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둔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임시정부 내에 내분마저 일어나고 맙니다. 국제사회에 처우와 호소를 통해 독립을 이루려던 노선과 무쟁 항쟁을 지지하는 노선이 갈라지는데요. 김가진 선생 역시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추대 받아 상해를 떠날 고민까지 합니다.
어려워진 조건 속에서 정정화 지사는 다시금 국내로 들어가려고 하는데요.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건너기로 합니다. 다행히도 다리에 들어 설 때는 일본 순사의 검문은 없었습니다. 다리를 통과할 무렵 일제 순사들이 다가와 형식적인 검문을 실시했는데요. 예기치 않은 검문에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를 의심한 순사에게 체포당합니다. 지사는 신의주에서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었고 친일파 형사 김태식에게 조사받은 뒤 ‘상해에서 살기가 힘들어 친정으로 돌아가려 했던 길’이라 둘러대 가까스로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931년까지 세 차례 더 귀국하여 독립 자금을 모았습니다. 1932년부터는 정세가 급변하여 더 이상 국내에서 임무는 수행하지 못하는데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에서 투탄 의거에 성공합니다. 김구 선생은 모든 과정이 자신의 소행이라는 성명서를 각 언론에 발표했고, 다음날인 4월 30일부터 임시정부 식구들은 상해를 탈출합니다.
1937년 7월7일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시작된 중일전쟁 이후 정정화 지사는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는데요. 국무위원들 손수 모시며 도와드렸습니다.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선생의 식사를 해결하고 뒷바라지를 책임졌습니다. 1940년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이동녕 선생의 임종을 지킨 이도 정정화 지사였습니다. 노환으로 자리에 누우시고 곡기를 끊은 지 열흘 만에 순국하였는데요. 병석에 누워 기동을 못하시던 열흘 동안 꼬박 곁을 지켰습니다.
또한 이 시기 정정화 지사는 1935년 한국국민당 다원, 1940년 한국도립당 생계위원회 위원과 대한애국부인회 등을 맡았습니다. 여성동맹 간사를 맡으며 지사는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했는데요. 임시정부나 광복군에서 외국 손님을 대접하거나 자체에 큰일 있을 때 정정화 지사가 총책임을 지고 일을 치렀습니다.
임시정부에는 딸린 식구들이 많았는데요. 자녀들을 교육 지도하는 일도 지사와 부인들 역할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다니는 곳과 장소를 마다하지 않고 자녀들을 모아서 가르쳤는데요. 우리나라 역사, 국어, 노래, 춤을 알려주었고 이 일은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해방을 맞이했지만 정정화 지사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우리의 독립은 과연 쟁취된 것일까? 남에게 빼았겼던 것을 우리 손으로 도로 찾아온 것일까? 조국의 운명을 손에 거머쥔 채 고난과 역경의 이국땅에 망명한 임시정부와 함께 25년을 같이 살아온 나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사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는 길 역시 험난했는데요. ‘전쟁 난민’ 신분으로 미군 전차 상륙함인 LST 수송선에 실려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간다, 돌아간다. 이제야 나 살던 산천에 간다. 전쟁 난민이라고 미군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어떠랴. 돼지우리 같은 엘에스티 난민선을 타면 어떠랴. 거룻배라도 좋다. 주낙배라도 좋다. 고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일엽편주인들 어떠랴. 우리는 난민이었고 거지 떼였다. 그렇게 추방당했다. 임시정부고 주석이고 뭐고 전부 개인 자격이었던 판에 우리야 오죽했으랴.‘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하고서도 난민선을 타고 귀국한 상황은 앞으로 벌어질 비극의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정정화지사가 평생 모시던 김구 선생이 피살되었습니다. 임시정부 시절 가진 돈은 죄다 폭탄이나 무기 장만에 썼기 때문에 개인은 먹고 사는 게 늘 어려웠습니다. 그럴때마다 김구 선생은 정정화 지사를 찾아와 ’후동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라며 식사를 청했습니다. 항상 다정하고 자상하며 격의 없는 분이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전면전이 발발했고 남편 김의한 선생이 남북되고 말았습니다. 1951년에는 부역죄 혐의로 다시 한 번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됩니다.
’종로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왜놈 경찰의 손에 이끌려 붙잡혀왔던 바로 그 종로서였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종로서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내 심정은 갈가리 찢겨갔다. 왜놈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갈 때와 부역죄로 동포 경찰관의 손에 끌려 들어갈 때를 견주어 보아 모든 게 너무나 달랐다.‘
조사 과정 중에 정정화 지사에게 손찌검을 하는 형사도 있었습니다. 검찰기소 후에는 구치소에 갇혀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엉터리 재판도 이어졌는데요. 같은 죄로 기소된 20여 명 피고가 ’비상사태 하의 특별조치령‘으로 기소되었는데요. 피고인들은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다 관련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지사는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후에도 한동안 요시찰인 딱지를 붙이고 예비검속으로 출두해야 했습니다.
굴곡진 세월을 다 겪고 나서 정정화 지사는 1991년 11월 2일 향년 91세로 눈을 감으시는데요. 살아생전 민족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에 그토록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안장되어 있습니다. 남편 김의한 지사 유해는 평양 재북 독립운동가 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시아버지 김가진 선생은 지금까지도 중국 상해에 묘비도 없이 잠들어 있습니다.
참고자료: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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