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숙론], 김영사, 2024.
(114~ 120쪽)
나는 오래전부터 경협coopetition 개념을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경헙은 보다시피 협력cooperation과 경쟁competition의 합성어다. 일찍이 1913년부터 있어온 개념이지만 나는 각각 하버드대와 예일대 경영대 교수였던 애덤 브랜던버거와 배리 네일버프가 1996년에 출간한 책 [경협]을 통해 핵심 내용을 터득했다. 자연계에서 중간에 벌어지는 관계로 경쟁, 포식, 기생, 공생 네 가지가 있다.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해가 되는 관계가 경쟁이고 서로에게 득이 되는 관계는 공생이다. 한편 한 종은 이득을 보고 다른 종은 손해를 보는 관계로 포식 또는 기생이 있다.
그러나 나는 경쟁을 나쁜 관계들과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인 분할이라고 생각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걸 원하는 존재들은 늘 넘쳐나는 상황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은 맞붙어 상대를 제압하는 것 외에도 포식, 기생, 공생 등을 고안해냈다. 자연계에서 가장 무거운 생물 집단이 무엇일까? 그건 고래나 코끼리가 아니라 꽃을 피우는 식물, 즉 현화식물이다. 이 세상 모든 동물을 다 협쳐도 식물 전체의 무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지구는 누가 뭐라 해도 식물의 행성이다.
그렇다면 자연계에서 수직으로 가장 성공한 집단은 누구일까? 단연 곤충이다. 그렇다면 곤충과 식물은 과연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을까? 한곳에 뿌리를 내리는 바람에 움직여 다닐 수 없는 식물은 꽃가루받이를 위해 애써 꿀까지 제공하며 ‘날아다니는 음경’을 고용하여 공생 사업을 벌였다. 곤충과 식물은 결코 호시탐탐 서로를 제거하려는 무차별적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게 아니다.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살아남았다. 평생 생물학자로 살며 깨달은 결론은 자연이란 손잡은 생물이 미처 손잡지 못한 것들을 물리치고 사는 곳이라는 점이다. 2014년 출간한 내 책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는 바로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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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의 절반이 위원회 활동을 통한 단체 성과로 판정된다면 나머지 절반은 개인 성과에 달려 있다. 이 수업에는 교재가 따로 없다. 당연히 나는 교재의 내용을 반복하는 구태의연한 강의를 하지 않는다. 대신 학생들이 위원회 활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주제들을 선정해 강의를 기획한다. 짐작하는 대로 주제가 너무 다양해 내가 혼자 강의하기는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그중 일부만 담당하고 나머지 주제에 관해서는 내 인맥을 총동원해 탁월한 강사를 초빙하는데 워낙 탁월한 전문가들이라서 학생들의 호응이 대단하다.
이 수업의 강의계획서에는 ‘Reading - Writing - Speaking intensive course (읽기 - 쓰기 -말하기 위주 수업)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강의를 듣는 부분 Listening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건 모든 수업이 전통적으로 다 갖고 있는 속성이라 구태여 강조하지 않는다. 위원회 활동을 하려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섭렵해야 하기에 자연스레 많은 자료를 일게 된다. 나는 교수 인생 내내 출석 여부를 확인한 적이 없다. 대학생이면 성인인데 스스로 알아서 학업에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석을 점검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리라는 내 기대는 학기가 무르익어가며 아쉽게도 늘 무너진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에 관해 2,000자(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의 에세이를 작성해 제출하라고 요청한다. 원고지 10매는 얼추 일간신문 시론의 길이로서 대중을 설득하는 데 가장 적절한 분량이다.
학생들 중 누군가는 훗날 탁월한 논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미리 훈련한다는 의미로 요청한다. 내 강의는 놔두고 초청 강사의 강의에 관해서만 수강한 다음 날 자정 전까지 간단한 강의 내용 요약과 거기서 얻은 지식 및 교훈에 대한 본인의 느낌을 서술해 제출하도록 한다. 내가 초청한 강사들은 거의 대부분 책을 출간했기 때문에 그 책들을 중앙도서관에 지정 도서로 비치해 에세이를 쓰는 데 참고하도록 배려한다.
이렇게 하면 출석을 점검하지 않고도 수업 참여를 독려할 수 있다. 학기말에는 또 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며 얻은 지혜와 여러 전문가들의 강의를 통해 습득한 혜안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우려 그리고 그를 타개할 수 있는 본인만의 대책을 1만자(200자 원고지 50매) 미만의 논문으로 작성해 제출하도록 한다. 이 같은 개인적 기여도를 통틀어 성적의 나머지 50퍼센트를 평가한다.
나는 이 수업을 완벽하게 경협의 틀로 짰다. 성적의 50퍼센트를 위원회 활동으로 평가하다는 것은 공동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몸담은 위원회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나만 좋은 성적을 받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누구나 위원회 활동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위원회 활동에 매진하느라 자칫 개인 성과, 즉 훌륭한 에세이와 논문 쓰는 일을 소홀히 하면 그 또한 좋은 성적을 받는 데 치명적인 걸림돌이 된다. 매년 수업 첫 시간에 나는 사뭇 야비한 어조로 이렇게 설명한다.
“내 위원회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해 함께 노력한 친구들이 대체로 좋지 않은 성적을 받은 상황에서 나도 만족스럽지 않은 성적을 받는 것은 그나마 참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내 위원회가 탁월한 업적을 올려 성원들이 대체로 다 좋은 성적을 얻었는데 나만 위원회 활동에 너무 진을 빼는 바람에 에세이와 논문을 제대로 쓰지 못해 상대적으로 나쁜 성적을 받으면 세상에 그것처럼 억울한 경우는 또 없을 테지요. 우리 옛말에 배고픈건 참아도 아픈 건 못 참는다 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인 같은 위원회 소속 친구들을 방해하고 짓누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며 내 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모두 동반 추락하게 됩니다. 잘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그러면 길은 외길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최선을 다해 내 친구들과 협력해 우리 위원회를 최고의 위원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함께 위원회 활동을 하는 내 친구들이 잠시 쉴 때 나는 조금 더 뛰는 겁니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 때 나는 일어나 조금 더 일하는 거지요. 살아보니 이 세상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짓밟고 제거하며 올라서는 게 아니라 그들과 돕고 사는 가운데 내가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려면 그들이 잠잘 때 나는 일어나 조금 더 일하고, 그들이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조금 더 노력해서 한 발짝이라도 앞서 나가는 것임을 터득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내 수업은 삶의 축소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수업을 통해 인생을 한번 미리 살아보라고 주문한다. 경협으로 승리하는 방법을 시험해보라고 부추긴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손잡고 돕는 것이다. 지난 15년간 내가 지켜본 학생들은 자기 관리도 철저히 하지만 위원회 활동을 통해 숙론하며 협력하는 법도 터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어 달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때로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참으로 많은 걸 배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모두 내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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