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물 만난 해양민속학자의 물고기 인문학], human & books, 2024.
(121~ 127쪽)
밑반찬은 물론이고 젓갈, 액젓, 분말 등 감칠맛을 내는 데에 빠뜨릴 수 없는 식재료, 우리 식탁에서 멸치의 위상을 넘는 생선이 있을까? 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맛의 주연이다.
[자산어보]에서는 멸치를 추어, 멸어라 했다. ‘업신여길 멸’ 자에서 알 수 있듯 변변찮은 물고기로 여겼다. 국이나 젓갈 또는 말려서 각종 양념으로 썼다. 물고기 미끼로 사용했으며 선물용으로는 천한 물고기라고 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한 그물로 만선하는데 어민이 멸치를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으무로 이를 거름으로 사용한다. 건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삼고 회, 구이로 먹고 건조하거나 기름을 짜기도 한다’고 했다.
[난호어목지] 역시 멸치는 모래톱에서 건조시켜 판매하는데 우천으로 미처 말리지 못해 부패하면 거름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멸치를 다양한 식재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멸치는 남해안의 대표 어종이다. 방어, 삼치, 고등어 등 큰 물고기의 먹잇감으로 해양 생태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크기에 따라 대멸, 중멸, 소멸, 자멸, 세멸 등으로 구분하는데, 지역에 따라 세분하거나 단순화하기도 한다. 유자망으로 잡은 대멸은 주로 멸치액젓을 만들지만 회무침, 구이, 찌개로 먹기도 한다. 부산 대변항과 경남 남해군 미조항이 멸치 유자망 어업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연예인들이 유자망 어선을 타고 멸치잡이 체험을 하는 TV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몸으로 하는 일은 뭐든 척척 해내는 개그맨이 출연했다. 멸치잡이배를 타고 선원 체험을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멸치 털이를 하는 도중 갑자기 포기 선언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게 아닌가. “달인인 척하는 놈이 진짜 달인을 만났다. 작업 속도를 못 쫓아가니 계속 피해만 드리는 것 같아서 선원들에게 너무 죄송하다. 정말 존경스럽다”고 되뇌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세계 곳곳의 정글과 극한 환경에서 생존을 펼쳐온 그의 입에서 ’포기'라는 말이 나올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었다. 그만큼 멸치 유자망 어업의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10시간을 거친 파도와 싸우고, 입항하자마자 2km에 달하는 그물에 걸린 멸치를 사람의 힘만으로 털어내야 한다.
멸치는 상온에서 빠르게 부패한다. 그래서 쉬는 시간 없이 온 힘을 다해서 2,3시간 멸치 털이를 한다. 너무 힘들어 한국인 선원들은 이를 기피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운 지 오래다.
멸치어업 조사를 위해 유자망 어선을 여러 번 탄 적이 있다. 또 다른 멸치잡이 어선인 권현망, 양조망, 정치망 어선을 탈 때와는 사뭇 다른 심정이 된다. 유자망은 멸치어군에 길목에 투망하여 지나가던 큰 멸치가 그물코에 꽂히게 하는 어법이다. 잡은 멸치를 싣고 항구에 도착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그물을 털어서 멸치를 털어낸다. 멸치 비늘은 사방으로 튀어 얼굴과 몸은 순식간에 은색으로 변한다.
그렇게 털이가 끝나면 선원은 지쳐 말이 없다. 이렇게 잡은 대멸로 액젓을 만든다. 멸치액젓은 선원들의 땀이 만들어낸 응축액이다.
부산 다대포후리소리보존회를 방문했을 때 보존회 이사장은 과거의 다대포 멸치잡이를 설명했다. 값싼 멸치를 젓갈로 담근 뒤 판매해 자식들을 키웠다며 옆에서 듣고 있던 노인이 거들었다. 다대포후리소리(부산시 무형문화재 제7호) 가사에도 멸치젓갈의 유용함이 표현돼 있다. 멸치를 잡아서 젓갈을 담가 나라에 상납한 후 부모 봉양하고, 형제와 이웃 간에 나눠 먹고, 논밭까지 살 수 있으니, 삼치, 꽁치, 갈치보다 낫다고 했다.
작고 흔한 멸치를 가장 중요한 어류로 꼽는 수산학자들이 있다. 멸치자원량은 연근해 수산생물 잠재생산량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 중 개체 수가 제일 많은 것이 멸치다. 먹이사슬에서 낮은 위치에 있어 다른 물고기의 먹잇감이 돼 해양생태계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 우리 선조들도 이런 사실을 얼핏 눈치채고 있었던 듯하다. “수영고래가 멸치를 먹는다고 한다. 내가 예전에 바닷가 어부에게 들으니 멸치 떼가 노는곳에 수염고래가 다가가 큰 입을 벌리고 멸치 떼를 흡입하면 멸치는 파도가 빨리 치는 줄 착각하고 떼를 지어 수염고래 배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오주연문장선산고] 중에서) “동해에서 나는 것은 항상 방어에게 쫓겨 휩쓸려서 오는데 그 형세가 바람이 불어 큰 물결이 이는 듯하다. 바다 사람들은 살펴보고 있다가 방어가 오는 때를 알고는 즉시 큰 그물을 둘러쳐서 잡는데 그물 안이 온통 멸치이다.”([난호어명고] 중에서) 수염고래, 방아 등 큰 물고기의 먹잇감이 멸치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멸치는 연중 알을 낳는데 봄, 가을에 집중된다. 성장이 빠르고, 자주 산란하므로 개체 수가 쉽게 줄지 않는 건 다행이다. 수산학자들의 견해처럼 다른 물고기의 먹잇감이 바다 생태계를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불어 우리 밥상에서도 멸치는 단연 돋보인다. 액젓, 젓갈, 분말, 육수 등의 형태로 음식 미사을 돋우는 데 없어서는 단 될 맛의 지휘자이며 식탁 위 숨은 주인공이다. 흔해서 소중한 물고기가 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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