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 3인,
곽낙원, 정정화, 허은



곽낙원(1858~1939):김구 선생의 어머니. 1922년 아들이 있는 상해로 건너감. 1924년 며느리(최준례)가 사망하면서 손주(김인 당시 6세, 김신 2세)를 키우다 생활고로 1925년 작은손주 김신을 데리고 귀국. 1927년 큰손주도 데려와 키우다가, ??년도에 상해로 다시 가서 아들 김구선생과 손주들과 함께 생활함. 1932년 상해를 떠나 이동하다 중경에서 1939년 사망함. 해방 직전 중경에서 사망한 손주 김인(1918~1945)과 나란히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됨.
(김구, [백범일지]에서 발췌)
민국 2년(1920, 45세), 아내가 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왔다. 어머님은 내가 중국에 온 뒤에도 장모와 같이 황해도 동산평에 계시다가, 장모가 세상을 떠나자 민국 4년(1922, 47세) 상해로 건너와 오랜만에 함께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8월 둘째 신이가 태어났다.
상해에서 함께 가정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아, 민국 6년(1924) 1월 1일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둘째 신을 낳은 후, 몸도 채 튼튼치 못한데 2층에서 세숫대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층계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후 늑막염이 폐병이 되어 고생하다 상해 보륭의원에서 진찰을 받고, 서양 의료시설을 갖춘 홍구 폐병원으로 옮겼다. 나는 불란서 조계지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보륭의원에서 아내와 마지막 작별을 하였다. 김의한 부처(김의한, 정정화)가 병원에 들러 아내의 임종을 봐주었고, 나는 그들이 전해 주는 말만 들었다. 나는 아내를 불란서 조계 지역인 숭산로 경찰서 뒤 공동묘지에 묻었다.
나는 독립운동 기간 중에 혼례나 장례 등 의식으로 돈을 낭비하는 것에 찬성치 않았다. 그래서 아내의 장례도 검소하게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동지들은 아내가 나로 인해 고생을 겪은 것이 곧 나랏일에 공헌한 것이라며, 각기 돈을 거두어 장의를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 주었다.
아내가 입원했을 때 인이도 병이 중하여 공제의원에 입원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 완전히 나아 퇴원하였다. 당시 신이는 겨우 걸음마를 익히고 젖을 먹을 때였다. 아내가 없자 어머님은 신이를 우유로 기르셨는데, 밤에는 당신의 빈 젖을 물려 재우셨다. 신이 차차 말을 배울 때는 단지 할머님만 알고 어머님이 무엇인지 몰랐다.
상해에서 우리는 극도로 어렵게 살았다. 그때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청년들과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어머님께서는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에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것을 보시고는, 매일 밤 먹을 만한 것만 골라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찬거리로 만들어 놓으셨다.
상해에서 살기가 더욱 어려워지자, 민국 7년(1925, 50세) 어머님은 네 살이 채 안 된 신이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큰아이 인이를 데리고 여반로 단층집을 세내어, 이동녕 선생 및 몇몇 동지들과 함께 살았다. 그때 어머님이 담가 주신 우거지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
1925년 11월 귀국하실 때 여비를 넉넉히 드리지 못하였으므로, 어머님은 인천에 상륙하시자 바로 여비가 떨어졌다. 어머님이 동아일보 인천지국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시자, 지국에서는 경성 갈 여비와 차표를 사 드렸다. 경성에서 다시 동아일보사를 찾아가니 사리원까지 보내 드렸다.
고국에서도 어머님은 밤낮 상해에 있는 자손을 잊지 못하시고 생활비를 아껴 적은 금액이라도 보내셨다. 그러나 그것은 화로 속의 한 점 눈송이처럼 별 보탬이 되지 못했다. 내 사정을 알아채신 어머님께서 민국 9년(1927, 52세) 다시 인이까지 본국으로 보내라고 명하셨다. 인이까지 귀국시키니, 상해에서 나는 다시 혈혈단신으로 한 점 딸린 식구도 없게 되었다.
정정화(1900~1991):1900년 서울에서 태어나 열한 살 나던 해에 대한협회 회장을 지낸 동농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결혼한다. 21세 되던 해 중국 상해에 망명해 있던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함으로써 중국에서의 망명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임정밀사의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령을 띠고 지하 조직을 통해 국내에 잠입, 밀령을 수행한다. 1차 국내 잠입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국경을 넘나든 그녀는, 1932년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사건으로 임정 요인들과 함께 상해 프랑스 조계를 탈출, 망명정부를 뒤바라지하면서 해방되기까지 10여 년 동안 대륙의 피난길을 떠돌게 된다. 중경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으며 그녀는 전쟁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에 발을 디디었으나 다시 6.25를 겪으면서 남편이 납북되고 가족이 흩어지는 와중에서부역죄로 구속 기소되어 투옥된다. 40년 세월이 흘러 그녀는 그녀가 겪어온 100년 남짓 쓰라린 세월의 모든 것을 비로소 증언하고, 1991년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정정화, [장강일기]에서 발췌)
우리가 첫아들을 얻었을 때는 성엄이 직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형편이 조금 나아졌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일을 맡아 하는 분들은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당시 임정의 살림은 석오장과 백범 몇 분이 거의 다 짊어지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돈이 바닥날 때가 많았고, 그럴 때면 그야말로 끼니가 간데 없어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면서 한 술씩 얻어드시기까지 했다.
우리집은 아이를 키우면서 단 세 식구가 살게 되었고, 백범이 우리집에 와 아이를 돌봐주곤 했다. 아이가 낯을 몹시 가려 아무한테나 선뜻 가는 법이 없었는데, 백범이 아이를 잘보는 탓에 유독 백범의 품에서만은 울지도 않고, 보채는 일도 없이 그렇게 잘 놀았다.
백범은 워낙 체격이 좋고 우람하여 식사의 양이 좀 많은 편이었다. 어쩌다 자금이라도 좀 생기면 임정의 살림 비용뿐만 아니라 백범이 책임맡고 있는 애국단의 폭탄이나 무기 장만 등의 비용에 우선적으로 쓰였으므로 개인적으로는 먹고 사는 게 늘 어려웠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하면 서너 시쯤 백범이 우리집으로 온다.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암요, 해드려야조, 아직 점심 안 하셨어요? 애 좀 봐주세요. 제가 얼른 점심 지어드릴께요.”
왜놈 잡는 일에는 그렇게 무섭고 철저한 분이지만, 동고동락하는 이들에게는 당신 자신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겉으로 나타내는 법 없이 항상 다정하고 자상하며 격의없는 분이 백범이었다. 반찬거리를 사다가 밥을 지어서 갖다 드리면 어떻게나 달게 드시는지 빨리 형편이 펴서 좀더 나은 걸 해드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곤 했다. 궁하기가 짝이 없어도 언제나 꿋꿋하고 굳센 분이라 속상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하루종일 말 한마디 없이 꾹 참고 앉아서 궐련만 피우곤 했었다.
당시 중국에는 통담배라고 해서 동그란 통에 50개비 들이 궐련이 있었다. 백범은 하루에 그 궐련 한 통을 다 피우는 대단한 끽연가이기도 했는데 나중에 중경에 있을 때 하루 아침에 담배를 끊은 일이 있다.
안중근의 동생되는 안공근이 상해에 있을 때 형 안중근의 일로 말썽을 일으키고 공금을 챙겨 홍콩으로 잠시 피한 일이 있었다. 재주가 많고 말을 잘 하는 이라서 여기저기에 허튼 소리를 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임정 어른들께 야단을 맞게 생겼으니까 홍콩으로 도망갔던 것인데, 임정이 중경으로 옮겨갔을 때 홍콩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용케 홍콩을 빠져나와 중경으로 왔다. 그때 백범이 그를 붙들어 놓고 타일렀다.
“이제 사람이 돼라. 지금 이 자리서 결심을 해라, 그 대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이 담배를 끊겠다. 너 사람이 될 때까지.”
그후로 백범은 담배를 끊었다. 한마디로 안하겠다면 안하는 분이었으니, 그렇게 즐겨 피우던 담배도 하루 아침에 끊어 버린 것이다.
안중근의 조카딸 안미생이 백범의 큰며느리였으니까 사실 백범과 안공근은 서로 사돈 집안이었고 해서 서로 무척 가깝게 지내며 친형제처럼 대했었다. 그러나 백범의 성품으로는 공적인 일만큼은 사사로이 처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30년이 되었다. 이십대의 철부지였던 우리 내외도 이제는 서른 살의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삼십대의 망명객은 사십대가 됐으며, 오십대의 장년은 육십대의 노인들이 되었다. 그러나 부풀었던 희망은 줄어들었고, 독립의 전망은 보다 요원해지기만 했다.
하나의 일탈자가 생길 때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만큼 의기가 저하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반대로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날로 강대해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중국을 빼놓고는 임시정부에 유일하게 물질적 원조를 준 바 있는 소련도 레닌의 사망과 더불어 국제주의적 정열이 식었는지 임정과의 모든 유대를 거의 끊다시피하고 있었다.
한국의 독립에 적극적으로 동정하였던 손문도 레닌이 사망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1927년 장개석 주도 하의 반공 쿠데타가 있은 후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국민당은 반공 일변도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반공을 위하여 일본에게 무조건 양보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정세도 도처에서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 보였다. 유럽에서는 파시스트 정권이 이탈리아를 손아귀에 넣었다.
모든 것이 어둡기만 한 시대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의기가 저하되었다 하더라도 항일운동이 전반적으로 쇠퇴했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다. 만주를 근거로 한 무장 독립군들은 자주 국경선을 넘어 일본 경찰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또한 교육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국민의 의식이 날로 심화되었고, 국내에서의 저항운동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1926년의 6.10만세 사건에 이어 3년 후에는 광주 학생의거의 거센 물결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상해에 있는 우리는 해방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으며, 희망을 가지고 망명생활을 계속하였다.
허은(1907~1997):경북 선산 출생, 1915년 부친 따라 서간도로 이주, 1922년 석주 이상룡선생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 1932년 시아버지 이상룡선생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돌아가시면서 환국하여 안동의 임청각 종부로서 안살림을 맡음. 1995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출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발췌)
내가 시집가기 십 년 전, 1913년에 시아버님은 고향집 임청각을 팔려고 매도증서를 준비했다고 한다. 학교 운영비와 활동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중에서 못 팔게 해서 어른께서 막 소리 지르고 야단하셨다고 한다. “내 집 팔려는데 왜 못하게 하느냐”라고 하시며, 합방 후라 일본 정부에서 방해를 하기도 해서 결국 못 팔았다. 그 대신 문중에서 돈을 좀 만들어 주어서 그것을 가지고와 보태 썼다는 것을 나중에 시집오고 나서 들었다.
열여섯 살 되던 해(1922년), 음력 섣달 스무이튿날로 혼인날이 정해졌다. 철로 육로 합해 이천팔백 리 길인데 이렇게 분주한 시국에 더 이상 미루는 건 안되겠다 싶어 결정한 것이라 했다. 길림은 시내 여관에 들면 일본 스파이가 많아서 안된다고 여러 사람들이 제중의원에 가라고 했다. 이 병원 주인은 서울에서 왔는데 이시영, 이회영 씨 형제가 한국에서 만주로 올 때에 같이 온 모양이었다. 환전현에 있다가 길림에 온 지는 일 년 되었다고 했다. 이 병원은 동포들 치료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들 비밀연락처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갔을 때도 독립운동하는 분들이 다 모여 있었다.
기차로 마차로 해서 꼬박 열이틀 걸렸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시집가는 길이 그토록 험난할 줄이야.. 방안에 앉으니 과일, 떡국 등을 차려 내놓았다. 화전현 완령허 신랑집에서는 우리가 그곳을 향해 출발하던 날부터 잔치를 한다고 돼지를 잡고 친척들이 원근간 다 모였다. 그런데 십여 일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까 일부는 돌아가, 일부는 열이틀째 기다리고 있다.
1931년 일본이 만주까지 점거하니 항상 피해다니고 쫓겨 다니느라 활동 근거를 잃게 되었다. 그러자 친정아버지께서는 옥고 중인 당신 동생(허규)의 옥바라지라도 해야겠다며 귀국하시게 되었다고 하였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는 중국 땅이었다가 러시아 땅이 된 곳이다. 농경지가 많아 한국인들이 그곳으로 많이 갔다. 물론 독립사업도 그쪽으로 많이 옮겨 갔다. 왕산댁도 그래서 그쪽으로 갔다. 먼저 가서 자리 잡아 놓고 우리 친정도 그리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 친정은 안 갔지만 그때 가신 친척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못 나오고 있다가 공산 치하에 남게 되었다. 그때 같이 간 가족 중에서 왕산 어른의 셋째 아들인 다원 아재의 아들 둘이 구소련에 살고 있다.
당시에는 워낙 어려서 잘 몰랐으나 시집오기 전에 삼원포, 유하현, 고산자로 옮길 무렵이 학교와 세포단체가 많이 조직되고 활동도 활발했던 것 같다. 의견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한국 독립에 근본 목표를 두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한다는 의식을 일깨우려 하였다. 어쨌든 교육활동과 계몽활동도 그때가 가장 활발했던 것 같다. 항상 손님은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했다. 점심 준비하느라 어떤 때는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국수를 만들곤 하였다. 마당의 땡볕 아래서 맷돌을 돌려 가루를 내고, 또 그것을 반죽해서 국수를 뽑았다. 고명거리가 없으니 간장과 파만 넣어 드렸다.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첫애기가 들어섰다. 그해 양식이 없어서 고생했다. 좁쌀도 없어서 겨우 뜬 좁쌀을 구해 왔다. 그걸로 밥을 해 놓으면 색깔도 벌겋고 곰팡내가 나서 아주 고약하다. 쌀밥 한번 실컷 먹어 봤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중국인 집에 가서 소금을 조금 얻어다 김치를 담가서 겨우 입덧을 달랬다. 남편은 신흥무관학교에 다니느라 합니하에 가 있었다. 방학하면와서 잠깐씩 지내다 가곤 했는데 쌀밥 한 번 못해 주었다. 애기 낳은 지 한 달이 되니까 애 아버지가 왔다. 그때 잠깐 와 보고 훌적 떠난 후로 육 년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났다. 신흥무관학교 다질 때 벌써 독립운동 바람이 들었다. 열여섯 살에 그 학교에 들어가서 졸업학기에 이미 만주 전역과 전 조선을 훑고 다닌다고들 했다. 나타나면 그제야 왔다 보다 했다. 육 년 동안 네 분 어른들 조석 봉양하고 사랑손님들 치다꺼리만 해도 역부족이었다.
석주 어른은 집에 안 계실 때가 많았다. 북경 가셨거나 상해 가셨거나 했다. 아랫대 아버님은 집에 앉아서도 부민단 책임을 맡아 일하셨다. 부민단은 우리 친정의 성상 할아버지가 창솔하시고 초대 단장을 역임했었다. 2대 단장이 석주 어른이었지만 늘 외지에 가 계시니까 실무는 시아버님이 담당하신 거였다.
을축년(192년) 여름 석주 어른께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부임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내각책임제의 국무령이면 지금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상해에서 만주권 독립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활동은 북간도와 서간도를 망라한 만주 일대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그 쌓아 놓은 기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석주 어른은 그 이듬해 음력 삼월에 국무령을 사임하고 나오셨다. 만주권 인사들과 다른 계파 사이의 의견 충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주도권 싸움이었겠지만 그 당시 임정은 여러 파로 갈라져서 세다툼이 심했다. 국내와 중국 만주 노령(러시어) 미주 등지에서 각각 활동하던 투사들이 합치기로 하고 모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부 사정이 복잡했다. 내분을 보다 못한 어른은 임정이 실패라 판단하시고 스스로 사임하신 듯했다.
1932년 오월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들어가서는 안 되니, 이곳에 묻어 두고 기다리도록 하라.”고 하셨다. 58년 만에 유골은 정부(국가보훈처)의 노력으로 환국했으나, 아직도 국적은 회복되지 못했다. 고택제향에 호화반석 같으신 처지시건마는 이역풍진에 갖은 고초 다 겪으시고 광복 성공의 기약 없이 영원히 가셨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 우리는 환국을 서둘렀다. 시신과 함께 시조모님, 시부모님, 남편, 아들 형제, 모두 일곱 식구였다. 그동안 한가족처럼 지낸 온 이진산 씨네 가족도 함께 떠났다. 석주 어른 임종하실 때에 “선생님, 선생님! 광복사업은 누구에게 맡기고 가십니까? 통화현, 회인현, 영춘원 양쪽 칠십 리 높은 재를 넘으실 때 기력이 좋으시어 독립사업 꼭 성공하리라 믿었습니다.” 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적수공원 애국심 하나만 가지고 망명의 길로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른의 한을 대신 울어 드렸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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