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동네 한 바퀴

이춘아 2025. 12. 1. 21:20


박노해, [눈물꽃 소년-내 어린 날의 이야기], 느린걸음, 2024.

(67~74쪽)

“아가, 정미소댁이 몸살이 심한 갑드라. 찹쌀에 낙지를 고았으니 갖다드리고 오니라.”

할머니가 목도리를 둘러주며 묵직한 놋그릇을 내미셨다.  나는 행여 쏟을세라 눈을 크게 뜨고 돌부리를 피해서, 꼬리치며 따라나서는 강아지를 살핌시롱, 조심조심 걸어가 그댁 마루 위에 죽을 내려놓고서야 후우, 숨을 쉬었다.

창호문이 열리고 이마에 수건을 묶은 아짐씨가 몸을 기울여 나를 반겼다.

“하이고, 평이가 이걸 여기까지 들고 왔다냐아. 고맙다잉. 잘 먹고 언능 일어나마. 할무니께 감사 인사 전하그라잉.”

또 얼마 뒤 할머니가 골목에서 놀던 나를 불렀다.
“아가, 샘터 옆 새댁이 첫 아그를 낳고서 젖이 잘 안나온갑드라. 애저 한 마리 고았응께, 새우젓 간 해서 다 드시라 전해라잉.”

이번엔 그릇이 아니라 냄비였다.
“할무니이 무거운디요. 샘터까지 가다가는 팔이 삐것는디요.”

“평아 으디 간다냐?”
물동이를 이고 오던 숙이 누나가 물어도 나는 발을 섯딛을세라 쳐다도 안 보고서 말했다.

“시방요, 아그 젖이요, 할무니가요, 애저탕을요, 나가요 저수지 얼음판 가는 것 같아서라, 나 그냥 가부께요잉.”
“호호호, 뭔 말이다냐잉. 암튼 애저탕이 평이 니를 담아들고 가는 것 같다야.”
나도 그만 웃겨서 손이 흔들릴세라 냄비를 더 꽉 쥐었다.

큰 팽나무 아래 동네 샘터에 이르자 배추랑 무우랑 아욱이랑 꼬막이랑 파래김이랑 갑오징어랑 저녁거리를 씻고 물을 뜨러 온 누나들과 엄니들이 “평아 그게 머시기다냐?” “뭔디 옥새마냥 살금살금 들고 간다냐.” “하이고 맛난 냄새네잉.” 한마디씩 건네며 또 나를 자꾸 불렀다.
“아 그니께 할무니가요. 새댁 아그 젖이요, 시방 나가 팔이랑요, 겁나게 무거워서라, 나가 말을 못 항께요….”

물기어린 바닥에 미끄러질세라 또 앞만 보고 걸었다.
“하이고, 느그 할무니 마음씨하고는. 평이가 다 켰다야. 할무니가 굽어질수록 평이는 아기 장군처럼 자란다야. 장하다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애저탕 냄비를 두 손으로 보시듯 들고 새댁네 사립문을 엉덩이로 밀고 마루에 내려놓고서야 털썩, 토방 댓돌에 주저앉았다.
새댁이 아가를 안은 채 얼굴을 내밀고 아재가 소 외양간에 걸어 나왔다.

“아유, 으쯔까나, 이 귀한 애저탕을… 할무니 당신 드실 것도 없을 텐데. 잘 먹고 젖 불어 애기 멕이면 안고 찾아뵙겠다 전해주그라. 우리 평이 멋져부네. 고밥다잉.”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무니 댕겨왔어라.”

긴장이 풀린 몸으로 하느적 하느적 평상에 풀썩 앉았다.
“하이고 우리 손주 고생했네. 이리 오소. 팔이랑 다리랑 아프제이. 이 할미가 인자 갈 날이 머지않아서, 마음은 청부른디 손발이 안 따라서, 우리 평이가 나서야 안 쓰겄는가.”

그 소리에, 힘들고 불만 차던 마음이 싸아하니 가시며, 갑자기 무섭고 슬펴져서 “할무니 할무니이, 가지 말어. 가면 안 돼.” 울먹이고 말았다.

“아가, 사람이 나이 들면 다 주름지고 닳아지고 흙이 되는 거시제. 그랑께 눈이 총총할 때 좋은 것 많이 담고 좋은 책 많이 읽고, 몸이 푸를 때 힘 쓰고 좋은 일을 해야 하는 거제이. 손발 좀 아낀다고 금손 되겄냐 옥손 되겄냐. 좋을 때 안쓰면 사람 베린다. 도움 주는 일 미루지 말고 있을 때 나눠야 쓴다잉. 다 덕분에, 덕분에 살아가는 것인께.”

그렇게 동네 사람들한테 감사받고 인사받는 좋은 일은 꼭 나를 불러 시키던 우리 할무니, 얼마 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얼마 뒤 벼락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른 봄날이었다. 해토에 애기 쑥과 달롱개(달래)와 냉이 싹이 고개를 내밀 즈음 건넛집 아재가 숙제하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우리 집 담장이 무너졌는디 말이다. 오후에 도울 손 있으면 좀 와 달라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올 수 있겄냐아. 평이 니 목소리가 파도처럼 힘차고 봄바람마냥 안 곱냐아. 니 말고 누가 있겄냐아.”

강석이 아재의 사근사근 배 씹는 소리 같은 부탁에 나는 동네 한 바퀴 돌음시롱 집집마다 일손을 청하였다.
오후가 되자 서른이 넘는 장정들이 아재 집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어라, 이게 뭣이여. 서너 발도 안 되는 담장 무너진 거 갖고서 일손 서른을 불러 모은다냐.”
“혼자 해도 사나흘 싸목싸목 하면 되겄구만 이깟 게 일이여 놀이여. 허허.”

동네 청년과 어른들은 흙을 이기고 돌을 고르고 척척 담장을 쌓다가, 차려낸 술상을 오가며 반쯤 놀고 반쯤 일하다, 한나절 만에 튼실하고 멋진 담장을 빚어냈다. 내친김에 뒷산의 진달래랑 다복솔이랑 동백 몇 그루를 떠 와서 심어 주고 장마 물길과 도랑 보수까지 말끔히 끝내는 것이었다.

“담장 자알 나왔네. 재주꾼들이 다 모여 거드니께 궁궐 담장보다 멋지네.”
“야아, 이 집 주인댁이 귀티가 나부네잉.”
“하이고 마마, 여기 바지락전이랑 도다리회랑 막걸리가 동났사옵니다. 하하하.”
“아재요, 형수요, 이참에 더 손 볼 거 있으면 다 해드릴랑께 말씀만 하씨요잉.”
먹을거리를 거든다고 누나들이 살금살금 모여들자 청년들은 더 힘을 내며 눈을 빛냈다.

그랬다. 동네 일이란 게 그랬다. 어찌 보면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 노작노작 느긋느긋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일이란 게 말이여. 평생 하는 일인디 말이여. 빨리빨리 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좋게 함시롱, 신명 나게 하는 게 더 중허제이.”
“그럼 그럼. 우리네 인생살이가 길게 보면 말이여. 서로 나누고 기대는 것이 최고의 효율이고 믿음이 아니겄는가.”
“암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제이.”
“그라제, 백지장도 맞들어봐야만 바위 같은 시련도 함께 맞들 수 있는 거제.”

”아따, 캄캄한 밤하늘 쬐맨 별들도 모이면 은하수가 되고 그리운 견우직녀도 만나볼제잉.“
”평이 땜시롱 우리 동네 청춘남녀 견우직녀 다 모여부렀네. 하하.“

그날 이후 ‘동네 한 바퀴’는 내 몫이 되고 말았다.

”평아, 강가 빨래터에 말이다. 지난 장마에 돌판이 떠내려갔는디 여태 손을 못 봤다. 오늘 날도 좋은께 남정네들 몇몇 와서 너럭바위 좀 깔아 달라고 전하믄 좋겠구만잉.“
”동네 우물에 이끼가 떠오르던디, 물 말갛게 나오게 닦을 일손들 좀 모아 온나.“
”누나들 노는 정미소 마당 배구장 안 있냐. 거그 그물이랑 기둥이 서금서금하더라. 나무 좀 새로 해와서 짱짱했으면 좋겄는디. 햇살 좋은 쪽에다 긴 의자도 좀 만들어주고잉.“
”염전 물수레가 삐그덕 하드만. 오늘 해 지기 전에 모여 수리해 불자고 싸게 한 바퀴 돌고 오니라.“

그럴 때마다 나는 매번 더 단정하고 사려 깊게, 더 환한 낯빛으로 일손을 청하러 다녔다.

”나가 느그 할무니한테 보살핌받은 게 얼마인디, 평이가 부르면 안 갈 수가 없제이.“
”그려 그려, 거름 두 지게만 내고 갈 테니께 먼저 가그라.“‘
“내 아랫논 물꼬만 잡고 얼른 가마.”
“아따, 평이가 동네 한 바퀴 돌았다 하면 일손 넘치게 모으네 그려. 이러다 커서 나라 한 바퀴 돌았다 하면 온 나라 일손 다 모으것네. 하하하.”

그렇게 한해 또 한해가 흐르면서 나는 건넛집 강석이 아재와 동네 어르신들의 속 깊은 그 마음을 알게 되었다.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 젤 아픈 욕이던 시절. 말을 잃고 풀이 죽어가던 나를 부추겨 ‘동네 한 바퀴’ 사명을 줌시롱, 서로 알게 모르게 어린 나를 붇돋아 주고 내 꺾인 날개를 되살려 주던 말 없는 배려와 보살핌의 마음들. 덕분에, 덕분에, 나는 더 정하고 더 올곧고 더 힘차게 자라날 수 있었으니.

내 그립고 고마운 ‘동네 한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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