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바로 이거였어!

이춘아 2025. 9. 13. 10:10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원서발췌 [죄와 벌](김정아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8.

(99~106쪽)
‘그래 바로 이거였어! 이게 모든 결론에 대한 해명이야!’ 그는 엄청난 호기심에 사로잡혀 그녀를 바라보며 혼자서 이렇게 결정했다.

낯설고 이상한 거의 병적인 감정을 느끼며, 그는 이 핏기 없이 창백하고 윤곽이 고르지 못한 모가 난 수척한 작은 얼굴과, 격렬한 불길과 준엄하고 강렬한 감정으로 번쩍거리며 빛날 수도 있는 유순하고 푸른 눈망울과, 화가 나서 여전히 분노에 떨고 있는 그 조그마한 체구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점점 더 이상하게,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유로디바야! 유로디바야!’(백치로서 예언을 한다고 믿어지는 행자를 뜻하는 유로디비이의 여성형) 그는 맘속으로 이렇게 단정했다.

장롱 위에 어떤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방안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그게 거기 있다는 걸 알아차리긴 했는데, 이제야 그걸 손에 들고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러시어어로 번역된 신약성서였다. 가죽 표지가 씌워진 책은 얼마나 봤는지 낡고 다 헤어져 있었다.

”이건 어디서 구했습니까?“ 방 한쪽 구석에서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그녀는 식탁에서 세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여전히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누가 가져다주었어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마지못해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누가 가져다줬습니까?“
”리자베타가 가져다주었어요. 제가 부탁했거든요.“
‘리자베타라고! 거참 이상하군!”하고 그는 생각했다. 소냐에게 속한 모든 것이 시시각각으로 점점 더 이상하고 기묘하게  여겨졌다. 그는 촛불 가까이로 책을 가져다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나사로에 관한 얘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가 불쑥 이렇게 물었다.

소냐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집스레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탁지 쪽으로 살짝 비스듬히 서 있었다.

“나사로의 부활이 어디 있지요? 소냐, 좀 찾아 주십시오.”
그녀는 곁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기는 아니에요… 제4복음서에 있어요….”
그에게로 다가가지 않은 채, 제자리에 서서 소냐는 다소 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찾아서 내게 읽어 주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팔꿈치를 괴고 한 손으로 머리를 고인 채 들을 채비를 한 후 침울한 시선으로 한쪽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3주 정도 후면 저 멀리 정신 병원행이겠지! 만약 더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나도 거기 있을테고‘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이 이상한 청이 과연 진심인지 반신반의하며, 마지못해 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정말 읽어 본 적이 없으세요?” 탁자 저편에서 의심쩍은 눈으로 힐끗 그를 보며 그녀가 이렇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준엄해졌다.

“오래전… 중고등학교 때 읽어 봤을 뿐입니다. 어서 읽어 봐요!”
“그럼 교회에서 들어 본 적도 없어요?”
“나는… 교회에 안 다녀요. 그럼 당신은 자주 가나요?
”아, 아니요.“ 소냐가 속삭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빙긋이 웃었다.
”이해해요… 그럼 내일 아버지 장례식에도 안가나요?“
”걸 거예요. 지난주에도 갔어요…. 추도식에 참석하러요.“
”누구 추도식이요?“
”리자베타의 추도식이요. 그이는 도끼에 맞아 죽었어요.“
그의 신경은 점점 더 긴장되었고, 머리는 빙빙 돌기 시작했다.
”리자베타와는 친한 사이였습니까?“
”네… 그이는 정말 정직한 사람이었어요…. 제게도… 아주 가끔 왔었어요. 자주 오진 못했어요. 우린 함께 책을 읽기도 하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그이는 하느님을 보실 거예요.“

책을 읽는 듯한 그녀의 말들이 그에게는 이상한 감명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리자베타와 어떤 비밀스런 모임을 가졌다는 것도 또 그 둘이 다 유로디바라는 것도, 모두 새로운 소식이었다.
이런 곳에 있다간 나까지 유로디비이가 되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읽어요!“ 갑자기 신경질적이고 완강한 목소리로 그가 소리쳤다.
(…)
소냐는 책장을 넘겨 그 부분을 찾았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두 번이나 시작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첫 구절이 입에서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온 힘을 다해서 마침내 그녀는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셋째 구절부터는 마치 지나치게 팽팽하게 조였던 현이 끊어지듯 그녀의 말도 갑자기 툭 끊어지고 목소리의 울림만이 남았다. 숨이 막혀 오고 가슴이 옥죄어 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가 왜 자기에게 읽어주기를 주저하는지 어느 정도 이했했지만, 그 까닭을 잘 이해하면 할수록 점점 더 초조해져서, 거의 무례할 정도로 읽어 줄 것을 고집했다.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어 벌거숭이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그는 너무도 잘 이해했다.
(…)

그녀는 자신을 억누르고, 첫구절을 읽었을 때의 경련이 일듯 떨렸던 목소리를 억제해 가며 요한복음 제11장의 낭독을 계속했다. 이렇게 그녀는 19절까지 읽어 내려갔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여기서 그녀는 또다시 읽기를 멈추었다. 다시금 목소리가 떨려 말문이 막일지도 모른다는 수줍은 예감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소냐는 무척 힘에 겨운 듯 숨을 돌리고 나서, 마치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가 참회라도 하듯 누구에게나 다 들리도록 또박또박 힘주어 읽어 나갔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녀는 다시 멈추고 눈을 들어 흘끗 그를 쳐다보았지만, 재빨리 자신을 억제하고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쪽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한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탁자에 팔꿈치를 고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그래, 바로 어거였어!’ 그녀는 진짜 열병에 걸린듯이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녀는 전대미문의 가장 위대한 기적의 한 장면에 다가가고 있었고, 위대한 승리감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목소리는 금속으로 된 종처럼 울렸다. 그녀의 목소리 안에서 승리와 기쁨이 울려 퍼지며 점점 더 강해져 갔다. 눈앞이 어두워져 그녀 앞에 있는 글의 행들이 섞여 헛갈렸으나, 그녀는 다 외우고 있어 보지 않은 채 읽을 수 있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하는 마지막 구절에 와서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소경 같은 유대인들의 의심과 비난과 중상을 전하고, 그들이1분 후에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신앙을 갖게 되는 장면을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전했다…. ’이 사람, 바로 이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소경 같은 이 사람도, 이제 이 기적의 이야기를 듣고, 신앙을 갖게 되리라, 그래, 그렇게 되리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 되리라!‘하고 그녀는 바랐다. 그녀의 온몸이 이런 즐거운 기대로 떨려 왔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녀는 이 나흘이라는 단어를 특히 힘주어 읽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나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마치 자기 눈앞에 보듯이, 감격에 몸을 떨며 승리감에 찬 커다란 목소리로 그녀는 이 부분을 읽었다.)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책을 덮고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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