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일기

이춘아 2020. 10. 3. 06:37

이태준, [문장강화], 범우문고 129, 범우사, 2015(전자책 발행)

이태준(1904~ 미상): 한국의 소설가. 강원도 철원군 출신으로 본명은 이규태. 호는 상허, 상허당주인. 소설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일명 조선의 모파상이란 별칭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문장가로서도 유명하다.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이태준’이라 일컬어졌다. 이태준은 자신의 저서 [문장강화]에서 주장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 따라 소설을 썼다. 실제 이태준의 소설은 2020년대에 와서 읽어도 누가 따로 설명하지 않는 한, 1930년대 소설이라 믿기지 않을만큼 문장과 수성이 현대 소설과 비슷하다. 게다가 이오덕 선생이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전형이라고 칭찬했듯 깔끔한 표현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장가 중 하나였다. (나무위키에서)


’일기’

그날 하루의 중요한 견문, 처리 사항, 감상, 사색 등의 사생활기다. 

누구나 ‘그날’이 있고 ‘그날’ 하루의 생활이 있다. ‘그날’은 자기 일생의 하루요, ‘그날’ 하루의 생활은 자기 전생면의 한 토막이다. 즐겁거나, 슬프거나,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거나, ‘그날’의 하루를 말소하지는 못하는 만큼 ‘그날’이란 언제 어느 날이든지 자기에게 의의가 있다. 하물며 즐거워서 잊어버리기 아까운 날, 슬퍼서 백천의 인생 감상을 새로 경험하는 날이라, 우리는 이런 의의 있는 날을 곧잘 사진을 찍어 기념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진이란 결혼식이라든지 장례식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 있는 사건이 아니고는 촬영할 수가 없다. 인생의 고락, 중경사가 반드시 형태를 가진 것에만 있지 않으니. 실연한 사람의 아픈 마음이 렌즈에 비쳐질 리 없고, 석가나 예수가 대오를 얻은 것도 형태 없는 마음속에서였다. 누구나 그날 그날의 잊어버리기 아까운, 의의있는 생활을 기록하는 것이 일기이다. 보고 들은 것 가운데, 또 생각하고 행동한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을 적어두는 것은, 그것은 형태가 있는 것이나 형태가 없는 것이나 모조리 촬영한 생활 전부의 앨범일 것이다. 

그러나 일기는 앨범과 같이 과거를 기념하는 데만 의미가 다하지 않는다. 과거보다는 오히려 장래를 위해 의의가 더욱 크다. 

첫째는, 수양이 된다. 그날 자기의 한 일을 가치를 붙여 생각하게 될 것이니 자기를 반성하는 날마다의 기회가 되고, 사무적으로도 정리와 청산을 얻는다. 

둘째로는 문장공부가 된다. “오늘은 여러 날 만에 날이 들어 내가 기분이 다 청쾌해졌다” 한마디를 쓰더라도, 이것은 우선 생각을 정리해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생각이 되는 대로는얼른얼른 문장화하는 습관이 생기면 ‘글을쓴다’는 데 새삼스럽거나 겁이 나거나 하지 않는다. 더구나 일기는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쓰는 데 자유스럽고 자연스러울 수 있다. 글 쓰는 것이 어렵다는 압박을 받지 않고 글쓰는 공부가 된다. 

셋째, 관찰력과 사고력이 예리해진다. 견문한 바에서 중요한 것을 취하자면 우선 경미한 사물에도 치밀한 관찰과 사고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관찰과 사고가 치밀하기만 하면 ‘만물정관개자득( 萬物靜觀皆自得)’, 천상만물( 天上萬物)의 진상, 오의( 奧義)를 모조리 밝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일기는 훌륭한 인생 자습이라 할 수 있다. 


‘감상문’

자연, 인사, 생활, 일체 사물에서 얻은 감상을 주로 쓰는 글이다. 

감상은 정과 달라 자기 자신에서보다 어떤 대상, 자연이거나, 인사거나 한 사물을 객관적으로 상대해가지고야 얻는 수가 많다. 산천에 대한 감상은 산천을 대해가지고 얻을 것이요,생사에 대한 감상은 생사라는 그 사태를 대해가지고 얻을 것이다. 그런데 산천이나 생사를누구나 볼 수 있듯이, 자연, 인사의 모든 대상이 누구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안전에나 다 같이 개전되어 있는 것이다. “개울물도 맑기도 하다! 속이 다 시원하구나!” 하는, 촌부의 말 한 마디도 감상이요, “그느므 땅 걸긴 허이! 흙내만 맡아두 속이 흐뭇허네그려!” 하는, 농부의 말 한 마디도 훌륭히 감상이다. 고저심천의 차는 있을지언정, 감상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 글로 쓰기까지 할 감상이면 평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발하고 참신해서 읽는 사람이 무엇으로나 놀랍고, 무엇으로나 새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어떤 대상이고 무심히 보거나 쉽사리 생각해선 안 된다. 

감각과 사고가 예민해서 어떤 대상, 어떤 사태에나 투시하는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감상은 발견의 노력이 없이 탄생하지 않는다. 육안 이상으로 정관, 응시, 명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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