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범, ‘삼국 시대의 아랍 바람’
...
옛날 한반도에 파고 들어온 아라비아의 사치한 상품은 유리그릇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옛 역사 연구에 바탕 자료가 되는 [삼국사기]에는 그들의 손을 거쳐야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들어 올 수 있었던 고급 상품의 이름들이 많이 보인다. 통일 뒤의 신라 귀족사회는 농민의 피땀 위에 걷잡을 수 없는 사치와 허영에 들떠, 통일 전의 굳센 기질과 부지런하고 소박한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같은 사치와 허영에서 일어나는 경제의 혼란을 막으려고 신분과 계층에 따라서 사용을 금하거나 제한했던 사치품이 있었다. 공작, 비취모, 슬슬, 답둥, 구유, 대모, 자단 같은 우리 눈에는 전혀 낯선 이름의 물품들이다.
몇 해 전에 불국사의 석가탑 속에서 나온 유향은 그 본고장이 팔레스타이나이며 중국의 잡지 소설 같은 데에 자주 나오는 온갖 귀신을 물리치는 자바의 향료와는 다른 고급 안식향이다. 이것은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 시바에서만 나는 특산품이며,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상인의 손을 거쳐 높은 이익이 붙어 극동에 뿌려진 고급 사치품이었다.
아라비아 사람이 동서 무역을 이끌어 가게 된 뒤에 눈에 띄는 일은 그들의 동남 아시아 진출이다. 그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도 사람의 손으로 열린 실론, 말레이 반도, 자바, 수마트라, 캄보디아, 베트남 같은 곳에 무역의 터전을 마련하고 중국의 여러 항구에도 머물러 있을 곳을 만들었다. 지금의 광동인 광주, 복건성의 천주, 양자강 북쪽의 양주와 내륙 지방의 남창은 중국에서 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이들이 머무는 곳을 중국 사람들은 번방이라고 불렀으며, 중국 정부는 그들 가운데에서 가장 덕망 높은 사람을 번장으로 뽑아 높은 벼슬을 주고 그들 나라의 법류에 따라 자치 생활을 하도록 해주었다. 그들이 중국 관리로부터 원칙적으로 개인의 생활을 간섭받지 않았던 것은 아라비아 상인을 통한 특수 사치품의 수입을 손쉽게 하려는 중국 관리의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외국상인이 붐비던 양주에서 계절풍을 타면 우리나라 흑산도까지 사나흘도 되지 않아 뱃길이 닿았으므로 무역에 밝았던 아라비아 사람은 신라와 이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신라 말기에 잦았던 기근으로 한반도 서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이 양주 지방으로 많이 옮아가서 이 지방에 신라방 같은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이루었던 것은 두 민족 사이의 접촉을 더욱 북돋우는 자극제가 되었다. 앞서 이야기한 신라 귀족층이 영화를 누리는 데에 쓴 특정 외래품은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쳤으리라고 판단된다.
9세기 아라비아 사람의 신라에 대한 설명이나, 그때에 그들이 무역을 위해서 손을 뻗친 일로 보아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신라 헌강왕 때에 신라에서 가장 큰 국제 항구인 울산을 거쳐 경주에 들어왔다는 “용의 아들” 처용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중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신비스럽게 나타나 있다. 용은 본디 우리의 옛 전설에서 바다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비를 내리게 하는, 곧 물을 뜻대로 할 수 있는 뛰어난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져왔다. [삼국유사]에는 이 때에 국제 항구인 울산에 나타났던 것이 처용만이 아니고 “일곱 사람”이었다고 씌어 있으나, 이보다 백 년이나 앞서 엮어진 [삼국사기]에는 “용이 아니라 그 모습이 무섭고 옷차림이 이상한” 네 사람이었다고 씌어 있다. 이밖의 책들에서도 처용은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야릇한 생김생김과 옷차림을 한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에 우리는 신라 사람이 처음 들어온 아라비아 장사꾼을 보고 놀라움에 차서 만들어 낸 전설을 중 일연이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악학궤범] 같은 책에 그림으로 이어져 내려온 처용의 탈에 이르러서 더 굳어진다. 긴 얼굴에 움푹 들어간 눈, 우뚝 솟은 높은 코는 얼핏 보아서는 아라비아 사람을 생각케 할 뿐만이 아니라 머리에 쓴 꽃으로 엮어진 쓰개마저 페르시아의 화관인 “다이아템”이나 그리이스의 “코로나”를 연상하게 한다. 더구나 [악학궤범]에 설명되어 있는 “처용춤”은 서울대학 교수 차주환 박사가 내세우는 설명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외국 사신이 들어올 때에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처용의 탈을 그려서 벽에 붙이면 나쁜 귀신이 달아나고 그 춤을 추면 나라가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아라비아 사람의 얼굴이 그때에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너무나 무서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거기에서 종교적인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이 그런 신앙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더우기 처용과 함께 들어온 사람이 [삼국사기]에는 네 사람으로, [삼국유사]에는 일곱 사람으로 되어 있음을 보아, 여러 사람이 떼지어 들어온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보면 이들이 살았다는 국제 항구인 울산에 있는 신방사는 이들을 함께 모여 살도록 해준 땅에 지은 절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래야만 앞에서 밝힌 “아라비아 사람이 이익을 많이 붙여 팔 수 있는 나라” 또는 “되돌아가기를 잊어 버리는 나라”라는 아라비아 사람의 신라에 대한 설명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처용”이라는 이름도 신라에서 사는 것이 허락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돈벌이에 큰 뜻을 두고 신라에 들어오긴 했으나 남의 땅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한 사람은,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에게까지 배반당하고 난 뒤에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라/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라는 서글픈 노래를 남기고 자신을 비웃으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리라. 그래서 지금껏 살아남아 우리 문학사에 색다른 냄새를 풍기며 전해 오는 서글픈 노래 한 가락과 전설만이 그들의 희미한 발자취를 보여 줄 따름이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행문 (0) | 2020.10.04 |
---|---|
일기 (0) | 2020.10.03 |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 (0) | 2020.09.26 |
'보람 있는 삶' (0) | 2020.09.20 |
'우리가 하는 일' (0) | 2020.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