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자연이 한 일은 다 옳았다

이춘아 2021. 4. 11. 05:43


박완서, [호미], 열린원, 2007. 

먹는 식물이라고 해서 마냥 자라게 할 수도 없다. 나는 우리 마당이 이랬으면 하는 꿈이 있다. 가꾼 티 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한겨울 빼고는 사철 꽃이 피어 보기에도 좋고 마음에도 위안이 되길 바란다. 남들한테 마당이 예쁘다는 칭찬도 듣고 싶다. 농사짓는 사람이 잘 된 논밭을 보고 흐뭇해하는 건, 단지 풍족한 수확의 예감 때문만이 아니라 건강한 농작물이 주는 미적 만족감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마당에 대한 그런 조급한 기대 때문에 이른 봄부터 이미 온실에서 개화한 수입 봄 화초를 내놓고 파는 꽃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 판, 두 판 사다가 여기저기 배치하고 땅속에서 겨울을 난 구근들도 보살피고, 여름에 필 꽃의 씨도 뿌린다. 그러는 사이에 목련과 매화, 살구꽃, 앵두꽃, 자두꽃이 거의 같은 시기에 피고, 조팝나무 라일락이 그 다음을 잇는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피었을 때 나는 나의 작은 집과 함께 붕 공중으로 떠오를 것 같은 황홀감을 맛본다. 나는 그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위해 견딘 모진 추위와 눈보라의 세월을 알기 때문에 오래오래 펴 있기를 바라지만 봄꽃의 만개기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 하필이면 무슨 심통인지 비바람이 불어, 그 꽃들을 무자비하게 떨군다. 딱딱한 꽃봉오리들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끈기 있게 어루만지던 따순 햇살과 부드러운 미풍을 보낸 것과 똑같은 자연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조급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낙화한 자리에 어김없이 열매가 맺어 있는 걸 보면 바람은 벌나비가 일일이 다 하기엔 역부족인 가루받이를 도와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고도 한두 차례 봄추위와 강풍이 지나고 나면 달렸던 열매들이 대폭 솎아져 실하게 자랄 것들만 남는다. 

지금은 한여름이다. 그렇게 자연의 자애와 폭력을 견디고 난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다. 매실은 이삼 일 안에 따서 엑기스를 만들어야 할 것 같고, 청청한 이파리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빛깔로 익어가는 살구와 자두도 지금 한창 과육 사이에 단물을 저장하고 있을 것이다. 살구나무는 내가 따기에는 너무 키가 크다는 걸 아는지 잘 익은 순서대로 매일 아침 한 바가지씩이나 그 예쁜 열매를 떨굴 것이다. 자두는 키가 크지 않으니까 내가 눈으로 봐서 잘 익은 걸 따먹을 수 있지만 까딱하다간 벌레들한테 먼저 먹히는 수가 있다. 그러나 내 눈썰미는 벌레한테 미치지 못한다. 내 경험으로는 벌레가 살짝 갉아 먹기 시작한 걸 따먹는 게 가장 당도 높은 자두를 따먹을 수 있는 비결이다. 이렇게 나무에 매달린 것들을 수확하기도 바쁘지만, 땅 힘이 가장 왕성할 때이기 때문에 땅이 내뿜는 것들을 건사하기도 요새가 제일 바쁘다. 잔디가 아주 잘 자라기 때문에 깎아줘야 하지만 그 사이에 잡풀도 매일매일 제거해줘야 하고 봄에 씨부린 봉숭아, 백일홍, 과꽃, 나팔꽃도 모종하기 알맞은 크기로 자랐으니 제자리를 잡아줘야 한다. 마침 이른 봄에 사다 심은 온실 꽃들이 시들어가니 그것들을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심으면 될 것이다. 꽃밭의 이모작인 셈이다. 그러노라면 매일 아침 흙을 주물러야 한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풀과 흙냄새를 맡으며 흙을 주무르고 있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과 평화를 맛보게 된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도 남들 못지않게 많았고, 심장이 터질 듯이 격렬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은 지금도 가끔 곱씹으면서 지루해지려는 삶을 추스를 수 있는 활력소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크고 작은 행복감의 공통점은 꼭 아름다운 유리그릇처럼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치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은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