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간도를 등지며

이춘아 2021. 5. 29. 22:11

최삼룡 허경진 엮음, [만주 기행문], 보고사, 2010.

강경애, 간도를 등지면서
   - 이 글은 [동광] 1932년 8월호에 게재된 것이다. 


1932년 6월3일 아침

씻은듯이 맑게 개인 하늘가에는 비행기 한대가 프로펠러의 폭음을 발사하면서 배회할제 용정촌을 등지고 떠나는 청도열차는 외마디의 이별인사를 길게 던졌다. 

나는 수많은 승객 틈을 뻐기고 자리를 잡자마자 차창을 의지하여 돌아보니 얼신얼신 벌어가는 용정촌.
 
그때에 내 머리에 얼핏 떠오르는 것은 내가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든 작년 이 때다. 

그때에 용정시가는 신록이 무르익은 가로수 좌우 옆으로 청천백일기가 멋있게 나붓기였고 붉고도 흰 벽돌집 사이로 흘러나오는 깡깡이의 단조로운 멜로디는 보랏빗 봄하늘 아래 고이고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로에서 헤매이는 걸인들의 이모양 저모양 그들에게 있어서는 봄날도 깡깡이 소리도 들리지 않는듯 역두에서 흩어지는 낯선 사람의 뒤를 따르면서 그 손을 버릴 뿐 그 험상진 손!

나는 이러한 옛날을 그리며 아까 역두에서 안타깝게 내 뒤를 따르던 어린 거지가 내 앞에 보이는 듯 하야 다시금 눈을 크게 떴을 때 차츰 멀어가는 용정시가 위에 높이 뜬 비행기 그러고 늦은 봄바람에 휘날리는 청홍흑백황의 오색기가 백양 나무 숲속으로 번들그렸다. 

차창으로 나타나는 논과 밭 그러고 아직도 잿빛 안개 속에 잠든 듯한 멀리 보이는 푸른 산은 마치 꿈꾸는 듯, 한폭의 명화를 대하는 듯, 그러고 아직도 산뜻한 아침 공기 속에 짙은 풀냄새와 함께 향긋한 꽃냄새가 코밑이 훈훈하도록 스친다. 

밭뚝 풀숲 속에 좁쌀꽃은 빨갛게 노랗게 피었으며 그 옆으로 열을 지어 돋아나는 조싹은 잎새를 두갈래로 벌리고 붉게 타오르는 동켠 하늘을 향하여 햇빛을 받는다.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 젖가슴을 헤치듯이 그렇게 천진스럽게 귀엽게!.... 어디선가 산새 울음소리가 짹짹하고 들려온다. 쿵쿵대는 차바퀴에 품겨 들리는듯 마는듯. 

“어디 가서요!”

하는 소리에 나는 놀라 돌아보니 어떤 트레머리 여학생이었다. 한참이나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서울까지 갑니다. 어디 가시나요”

혹시 경성까지 동행하게 되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이렇게 반문하였다. 

“네 저는 회령까지 갑니다.”

생긋웃어 보이는 입술 속으로 하얀 이가 내밀었다. 

“그리서요 그럼 우리 동행합시다.”
........

어느듯 차는 도문강안역에 이르렀다. 중국인순경에게 나는 일일이 짐 조사를 받은 후 옆자리 어린애와 몇마디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벌써 차는 슬슬 미끄러졌다. 

옆의 여자는 내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도문강이여요 에그 저 고기봐!”

말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머리를 돌려 굽어보았다. 

강변 좌우로 휘늘어진 버들가지에 강물 속까지 푸르렀으며 그 속으로 헤엄쳐오르는 금붕어 은붕어를 보고 나는 몇 번이나 하나 둘 셋 넷 하고 입속으로 그 수를 헤이다가 잊어버렸는지

“고기고기도 있어요!”

조그만손을 쑥 내밀어 가르치는데 나는 어린애의 손을 꼭 쥐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네게도 보이니 어디 있어 어디 가르쳐봐. 또 어린애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심코 이런 말을 했다가 내가 채처 묻는 결에 그만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지 머리를 숙이며 잠잠하다. 순간에 나는 그애가 아부지 어머니 틈에서 자라지 못한 불쌍한 애였음을 확실히 알았다. 

강 사이로 바라보이는 조선 땅! 산색 쫓아 이 편과는 확연히 다르다. 산봉이 굽이굽이 높았다 낮아지는 곳에 그침 없이 아기자기한 정서가 흐르고 기름이 듣는 듯한 떡갈나무와 싸리나무는 비오는 날 안개끼듯이 산봉 끝까지 자욱하야 푸르렀다. 

........

형사는 차례로 짐뒤짐을 하며 우리 앉은 앞으로 오더니 역시 내 짐이며 몸을 뒤저보고 몇마디 말을 물어본 후 간호부에게로 간다. 그는 언제나 삽삽한 태도와 유창한 일어로 대하여 준다. 

차는 도문강을 바른 편에 끼고 빙빙 돌았다. 실실이 늘어진 버들가지 사이로 넘처 흐르는 도문강물. 언제 보아도 싫지 않는 저 도문강물. 네 가슴 위에 뜻있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이 몇몇이 비쳤으며 의분의 떨리는 그들의 몸을 그 몇번이나 안아 건니었드냐.

숲속으로 힐끔힐끔 뵈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우막은 작년보다도 그 수가 훨씬 늘어보였다. 그 속에서도 어린애들이 소꼽놀이를 하며 천진스럽게 노는 꼴이 보인다. 

나는 이켠으로 머리를 돌리니 길회선철도공사인부들이 까맣게 쳐다뵈이는 석벽 위에 귀신같이 발을 붙이고 돌을 쪼아내린다. 나는 바라보기에도 어지러워서 한참이나 눈을 감았다. 다시보면 볼수로 아찔아찔하였다. 아래에 있는 인부들은 굴러내리는 돌을 지게 위에 싣고 한참이나 이켠으로 돌아와서 내려놓으면 거기에 있는 인부들은 그 돌을 이를 맞혀 차례차례로 쌓아 올라가고 있다. 

나는 차 안을 새삼스럽게 둘러 보았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그곳을 주시하는 사람조차 없는듯 하다. 모두가 양복쟁이었으며 학생이었으며 숙녀이었다. 우선 나조차도 저 돌한개를 만져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드냐.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나, 소위 인텔리층 신사 나리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누구보다도 나는 이때까지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으로 입고 무엇으로 먹고 이렇게 살아왔나. 

저들의 피와 땀을 사정없이 긁어 모아 먹고 입고 살아온 내가 아니냐! 우리들이 배운다는 것은 아니 배웠다는 것은 저들의 노동력을 좀더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느냐!

못난 나는 돌의 굳음을 모르고 흙의 보드라움을 모르는 나는, 아니 이 차 안에 있는 우리들은 이렇게 평안히 이렇게 호사스럽게 차 안에 앉아 모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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