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이광수
(편지형식으로 1933년 8월 9일부터 2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
2. 대련 도중기(1)
벗이여!
대련의 밤11시. 좀 피곤하지만 오늘 봉천에서 대련까지 오는 동안의 인상이 스러지기 전에 쓰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기로 이 붓을 듭니다.
봉천은(심양의 옛이름) 밤새에 오고 불던 폭풍우가 오늘 오전에 이르러서는 바람은 잦으나 비는 여전하였습니다. 봉천 구경은 수일 후에 회로에 하기로 되었으므로 오후1시40분발 급행으로 대련을 향하였습니다.
차는 만원. 비오는 평야를 55분이나 달리면 요양에 다다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만주의 평야라는 것은 북의 송화강 유역, 남은 요하 유역으로서 이 두 강과 그 무수한 지류가 이리 흐르고 저리 흘러서 지어 놓은 것이 세계에도 유명한 만주의 대평원입니다. 우리가 탄 차는 이 요하 평원의 동쪽을 달리는 것입니다. 오곡이 무성한 이 기름진 평야는 누가 보아도 욕심을 아니 낼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 평원은 아직 수수, 조, 피, 깨, 콩, 강냉이 같은 전곡을 심을 뿐이요, 아직 논은 개척이 되지를 아니하였습니다.
요양성은 남쪽 중심에 이 평야로 하여 생긴 도시입니다. 원래 오족의 구지로서 신채호 같은 이는 고구려의 안시성이라고도 하지마는 여행 안내에 의하면
‘요양은 거금 4천여 년 전 우공의 청주성이요, 한대의 요양현이요, 남북조 시대에는 조선의 영토가 되었다가 당대에 요주가 되어 다시 중국 영토가 되고 요대에는 동경이라 하였고 청조에서는 봉천 천도 전의 구도.’
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려나 요양은 만주 지방에서 가장 오랜 도시의 하나입니다.
요양은 그 이름이 보이는 바와 같이 요하의 북안에 있어 요하 평야의 농산물의 집산지임은 말할 것 없습니다. 일로 전쟁에 대 격전지였고 지금도 만철의 중요한 부속지의 하나입니다.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조선인 동포가 어떠한 생업을 하고 있는지는 다른 기회에 알아보겠습니다.
요양을 지나 얼마 안 가면 안산이라는 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만철의 안산 철광과 제철소가 있는 곳으로서 안산 제철소는 무순 탄광과 아울러 만철의 부속 사업 중에 두 기둥이라고 할 것입니다. 안산은 명일에 따로 보기로 하였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에 하려니와 안산역 부근의 낮으막한 산에 불그스레한 바위는 다 철을 함유한 광석이라고 합니다. 거미줄같이 경철을 깔고 광석을 날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안산에서 비는 잠깐 그쳤습니다. 비가 그치매, 동쪽 즉 좌편으로 큰 산맥 하나가 보입니다. 수없는 아름다운 봉들이 북에서 남으로 달아난 것을 보니 심상치 아니한 명산일 듯. 이것이야말로 요동의 금강산이라고 칭하는 천산입니다. 운무 중에 고저 각양의 뾰족뾰족하지 아니하고 가까우락 은현하는 것은 실로 기관입니다.
이 산은 표고는 최고봉이 2천 척에 불과하지마는 계곡이 대단히 복잡하고 많은 절경이 있다고 하며 산내에는 5대 선사와 도관, 아울러 32개의 절과 관이 있다고 합니다. 단풍 시절에는 더욱 탑승객이 많았으나, 사변 이래로는 반만당의 소굴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천산이라는 역도 있지마는 안산에서 철광용의 경철을 타면 바로 외산까지 갈 수가 있고 또 탕강자 온천에서 나귀로 갈 수도 있다고 하며 왕복 3일이면 산내를 다 볼 수가 있다고 합니다.
원래 남만에는 3좌 명산이 있으니 1은 고려문의 금석산(일명 고려성)이요, 1은 계관산이요, 1은 천산입니다. 다 같이 백두산의 내멱으로써 서를 향하고 달려서 금석산, 계관산, 천산을 순차로 이루었습니다.
3. 대련 도중기(2)
안산에서 대석교에 이르는 동안은 가장 반만군의 습격을 당하기 쉬운 위험 지대라고 합니다. 역에는 흉벽을 쌓고 참호를 판 곳도 있으며, 와방점역에 이르기까지는 선로의 남변 각 5백 미터 이내에는 수수(고량이라는 만주의 명물) 심기를 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조, 콩, 참깨 같은 키 작은 곡식만 심었습니다. 선로에서 5백 미터 되는 곳에는 흰 기를 간간히 세웠는데 그것이 고량 못 심는 지대를 표한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 사람은 참 수수를 사랑해요.”
하고 동차한 어떤 객이 설명합니다.
“수수는 우리네 쌀과 같이 상용하는 식량도 되고 술의 원료도 되고 또 수수깡은 건축 재료가 되고 화목이 되고 그리고 그 재는 거름이 되고, 또 수목이 없는 만주에서는 수수밭은 풍치림이 되고 서늘한 그늘이 된답니다.”
말을 듣고 보면 수수밭고하 만주 인민의 생활하는데 뗄 수없는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연면한 정서가 있는 것이 상상됩니다.
이러한 수수를 못 심는 것이 연선 주민으로서는 상당한 고통도 되겠지마는 수수밭은 아직 마적의 가장 사랑한 엄폐물이 되니 무가내하일 것입니다.
봉천, 대련간에서 가장 마적의 출몰이 빈번한 곳은 대석교 부근이라는데 이것은 삼각지(안봉선과 본선과도 구획된 부분)내에 있는 마적이나 반만군이 영구 방면으로 건너가는 노차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마적은 혹은 반만군은 보통 촌락은 습격하지 아니하고 만철역과 일본인 부락만을 목표로 한다고 합니다.
금주는 발해에 면한 아름다운 도시로서 그 지방에 있는 대화상산에 고구려 시대의 성지가 있다고 합니다. 산해관 이동 어느 곳이 우리 조상의 유적이 아니겠습니까.
말이 선후도착이 됩니다마는 보란점이라는 천일염으로 유명한 곳부터 일본의 99개년 조차지인 관동주 구역입니다. 별로 경계표도 없지마는 수목의 유무가 자연한 경제를 짓는 것 같습니다. 관동주 내에 들어가서는 산에 수목도 보이고 수수도 철도 연선에 마음대로 자랍니다.
근방의 가옥은 한대식이라고 칭하는 흙지붕의 집이 많습니다. 산동과 황하 연안의 가옥식이라는데, 지붕에 용마름이 없고 암기왓장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진흙으로 바른 것인데 해마다 새 흙을 바른다고 합니다. 어떤 지붕에는 풀이 무성한 것도 있는데 그래도 좀체로 비는 아니샌다고 하며, 또 황주 지방도 황하 연안과 같이 우량이 적은 까닭도 될 것입니다.
아주 척박한 바위등에 흙 한 켜만 입힌 듯한 잔잔한 구릉 사이를 돌아가 오후 8시에 아름다운 대련에 도착하였습니다.
4. 대련 구경
대련은 보래 빈한한 어촌으로 아라사 극동의 상업, 군사의 근거지가 되려던 여순항의 보조항이던 것이 일로 전역이 일본의 승전으로 되어서 포츠머스 강화 조약의 결과로 거금 28년 전부터 장춘 이남의 철도와 대련항이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의 손에 경영되게 됨으로 금일에는 인구 40만을 포옹하는 온갖 문명의 시설을 구비한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가로나 가옥이나 전부 서양식이어서 동양인것을 잊을 것 같습니다.
야마도 호텔이라는 궁사극치한 호텔에서 숙식을 할 수가 있고 부두의 7층 누상에 올라서면 연자 4킬로의 방파제 동시에 서에 벌인 부두에는 4천 톤급의 기선 35,6척을 일시에 들여 밀 수가 있고 2만 톤급의 거선 4척을 동시에 갖다가 붙일 수가 있는 축항을 일시에 바라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강 한 굽이와 같이 보이는 만을 건너서 보이는 감정자의 석탄 적재장은 동양 제1의 것이요, 세계에도 유수한 대규모의 신식 설비를 가진 것이라는데, 이것은 무슨 탄을 실어 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두에서 일하는 인부가 삼동 짐 많을 때에는 1만 2천인, 여름 한가기에도 7천 명을 불하한다고 합니다. 이 인부는 이른바 쿨리라는 것인데 그 산지는 거의 전부가 산동인이라고 합니다. 안내하는 만철 사원의 설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 성명 3자도 모릅니다. 그들 중에는 제 나이를 못 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일수록 힘이 세어서 4,50근짜리 콩깻묵 10개를 메어 나릅니다. 교육이 없을수록 노동에 적당한 모양입니다. 산동 쿨리는 과연 일을 잘합니다. 묵묵히 하루에 10시간, 12시간의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설명을 들으면서 그 퍼런 옷을 입은 쿨리들이 혹은 메고 혹은 끌고 그야말로 ‘묵묵히’ 부두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나는 마침 입항하는 대판 상선의 하르빈 환이라는 배에서 남녀 무수한 선객이 신호, 문사로부터 와서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화물선이 짐을 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대련항의 의미와 일본에 대해서의 중요성을 알고 또 아라사가 왜 그처럼 애를 써서, 그 묘액의 지를 탐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은 대련을 통하여 만선에 상품과 군대를 날라 오는 것이었습니다.
대련 보고야 나진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길회선과 나진과 신무학, 복목, 신사를 연합하여 줄을 그어보면 나진이 북만주(아마 서백리아까지도)와 일본 본토와의 상공업과 문화와 군사를 연결하는 큰 관절 또는 큰 흡반인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련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대련 남산 밑에는 충령탑이 있습니다. 이 충령탑에는 일로 전역의 전사자 40여의 유골을 장하였다는데, 탑 내에는 4실인가 5실이 있고 실에는 선반을 매고 선반 위에는 흑포로 싼 네모난 2천각이나 되는 백목상을 여러 층으로 안치하였습니다. 일본인으로 대련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은 단체나 개인이 반드시 대련 신사와 충령탑에 참배하고 나서야 여관으로 간다고 합니다.
충령탑의 연기를 설명하는 이는 말하되
“만주에는 다섯 충령탑이 있습니다. 여순, 대련, 요양, 봉천, 안동입니다. 이 다섯 충령탑에 안치한 충령은 약 10만입니다. 일청, 일로, 만주 사변을 통하여 10만의 장졸이 이 만주의 흙을 물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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