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십여 년 동안 땅 가까이에서 살았다. 매일 걷는 들판을 일 년, 이 년…. 십 년을 걸었다. 벼들이 자라는 한 생애가 들어오고,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알게 되었다. 뜰을 가꾸고 작물을 키우면서 꽃들이 피고 지는 걸 지켜보았다. 늦가을까지 생명을 잉태하는 가지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여린 몸으로 겨울을 나는 마늘의 생명력에 놀라워했다. 봄에 새들이 일 년중 가장 아름답게 노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녁이면 대숲에 들어와 잠을 자고 새벽이면 다시 날아오르는 수백 마리 참새 떼의 생리도 알게 되었다.
아래에서 볼 때 더 잘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위에서 보는 삶을 살려고 했다. 뭔가 그럴듯하고 위대한 것을 꿈꿨다. 더 높이, 더 멀리 삶을 따라잡으려 했다. 언젠가부터 그 삶을 돌이켜 느리고, 낮고, 단순하게 삶이 주는 것을 받아 살았다. 내 의지를 내세우기보다 삶이 흐르는 방향을 바라보고자 했다. 마음보다 정직한 몸을 믿었다. 일상에서 비근한 것, 근원적인 것, 작고 사소한 것들 가까이서 그리 살았다. 꽃이나 나무, 바람처럼 ‘스스로 그러한(자연)’ 것들이 하는 말을 듣고자 했고, 나 또한 ‘스스로 그러한 ‘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갔다. 삶의 신성성에 눈뜨는 시간이었다.
일상이 사무칠 때가 있다. 밥 먹고, 차 마시고, 함께 웃는, 그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사무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일상의 소중함은 그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건지 모르겠다. 요즘 우리는 일상을 잃은 시간을 살고 있다. 이 시간이 언제까지 갈지, 회복이나 될 수 있을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기후 위기의 적신호인 양 이례적인 긴 장마와 태풍에 노인들은 갇히고, 아이들은 친구들과 뛰어놀지 못한다. 긴 역병에 일터를 잃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돌보는 일을 주로 해 온 여성들의 삶은 더욱 무겁고 아프다. 나무들은 병들고 벼들은 쓰러져 눕고, 작물들이 녹아내린 밭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허리 숙여 황폐해진 밭을 일구고 무 씨앗을 뿌리고, 배추 모종을 심는다. 이웃에게 안부를 묻는다. ‘저 멀리에 있는’ 관념적 이상에게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일상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은다. ‘맹물 맛’ 같은 평범한 세계에서 신성성과 위대함을 구한다. 고귀한 일상을 살고 싶다. 삶의 근원이 되어 주는 것에 정성을 기울이고, ‘사소한 고귀함’으로 회생하자고 모은 손을 내밀고 싶다.
이 책은 [밥하는 시간]과 이어져 있다. 온갖 관념의 세계를 헤맨 끝에 만난 게 ‘아무것도 아닌’ 세계라는 역설, 그 역설이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많은 사람이 함께 겪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직관으로 쓴 글이 [밥하는 시간]이다. 관념에서 구체적 일상으로 내려오는 과정, 그 과정에서 겪을 지루함과 고됨, 자신과의 싸움, 그러면서 조금씩 쌓여 간 삶의 어떤 굳건함, 단순한 기쁨, 아름다움, 고요한 시간…. 그 일상의 즐거움이나 깨달음을 나누고자 했다. [밥하는 시간]이 시간과 장소에 세밀하게 집중한 글이라면 이 글은 좀 더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을 취했다. 시 산문이라는 형식을 빌린 짤막한 글을 모은 것이다. 십여 년 동안 틈틈이 일상과 자연에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의 기록이다. 절실하게 살아낸 끝에, 산사나무 열매처럼 붉고 단단한 언어를 얻고자 했으나 내 언어는 오염되고, 삶의 핵심을 빗나가기만 했다. 그 어긋남에 절망할 즈음 책이 만들어졌다.
[밥하는 시간]을 통해 만난 많은 여성들, 시대를 고민하는 에코 페미니스트들, 삶을 전환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허약한 인간인 내게 생명의 강인함과 명랑함을 가르치는 고양이와 물까치, 산수유와 목련, 눈 속에서 맨주먹 같은 꽃을 내미는 머위… 모두에게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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