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박자혜(1895~1943)

이춘아 2021. 6. 20. 00:48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전시 도록), 학고재, 2021.2.17~3.28

“나는 당신이 남겨놓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를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어 하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 [가신 임 단재의 영전에] 중에서 

경기도 양주(지금의 서울 도봉구 수유동)의 가난한 중인 가문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아기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갔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에 의해 궁에서 쫓겨난 뒤, 조상궁의 후원으로 숙명여고보 기예과에서 수학했다. 취업을 위해 1915년 다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의 간호부과에서 공부하고 졸업 후 조선총독부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3.1운동 당시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민족적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해 만세 시위와 동맹파업을 시도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뒤 북경으로 망명하여 연경대학 의예과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20년 봄, 민족운동가이며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를 만나 결혼하고 이듬해 아들 수범을 낳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1922년 홀로 국내로 들어와 산파 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 신채호는 김원봉과 의기투합해 조선의열단에서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는데, 박자혜도 의열단원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거사를 도우며 투쟁에 힘을 보탰다. 

1936년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며 옥바라지를 했다. 남편이 감옥에서 죽은 뒤 둘째 아들마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는 신산한 삶을 이어가다 1943년 병으로 홀로 눈을 감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그림 ᆢ 윤석남 화가,    글: 김이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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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혜, ‘가신 임 단재의 영전에 - 제문을 대신하여 곡하는 마음’, (1936년 [조광]제4호), 
외솔회, [나라사랑 3호)(1971.7 재수록)


밤도 깊어가나 봅니다. 우리 몇 식구가 깃들인 이 작은 방은 좁고 거친 문창이 달빛에 밝게 물들여졌읍니다. 수범이 두범이도 다 잠이 들었소이다. 아까까지 내가 울면 따라 울더니만 이젠 다 잊어버리고 평화스런 꿈세상에서 숨소리만 쌔근쌔근 높이고 있읍니다. 

나는 당신이 남겨 놓고 가신, 육체와 영혼에서 완전히 해탈된, 비참한 잔뼈 몇 개를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 안고 마음둘 곳 없어 하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읍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읍니까? 바쁘신 가운데서도 어린 것들을 유난스레 귀중해 하시고, 소매동냥이라도 해서 이것들을 유학을 시킨다고 하시던 말씀은 잊으셨읍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나는 불쌍한 당신의 혼이나마 부처님 품속에 편안히 쉬도록 하고자 이 밤이 밝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동대문 밖 지장암에 가서 마음껏 정성껏 애원하겠나이다. 

당신과 만나기는 지금(주: 1936년)으로부터 17년 전 일이었읍니다. 그 때 당신은 39세요, 나는 스물 네 살이었지요. 무엇을 잡아삼킬 듯이 검푸르던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옅어져 가고, 황토색 강물도 콸콸 넘치게 흐르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 주는 봄 —— 4월이었읍니다. 나는 연경대학(주: 현재 북경대학)에 재학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해에서 북경에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 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겨우 두 해를 함께 살다가 다시 상해로 가시고, 나는 두 살박이와 뱃속에 다섯 달 되는 꿈틀거리는 생명을 품어 안고 몇 년을 떠나 있던 옛터를 찾게 되었지요. 

그 뒤로는 편지로 겨우 소식이나 아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읍니다. 

당신은 늘 말씀하셨지요. “나는 가정에 등한한 사람이니 미리 그렇게 알고 마음에 섭섭히 생각 말라고.”

아무 철을 모르는 어린 마음에도 당신 얼굴에 나타나는 심각한 표정에 압도되어, 과연 내 남편은 한 가정보다도 더 큰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구나 하고 당신 무릎 앞에 엎드린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열과 성의와 용기를 다 어떻게 했읍니까? 영어의 몸이 되어서도 아홉 해를 두고 하루같이 오히려 내게 힘을 북돋아 주시던 당신이 아니었읍니까/ 

지난 2월 18일 아침이었지요. 아이들을 밥해 먹여서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데 전보 한 장이 왔읍니다. 기가 막힙니다. 무엇이라 하리까. 어쨌든 당신이 위급한 경우에 있다는 것이라 세상이 캄캄할 뿐이나 그저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어떻게 되든 간에 수범이를 데리고 그날로 당신을 만나려고 떠났읍니다. 

여순 형무소에 닿기는 그 이튿날 —— 2월 19일 오후 세시 십분이었읍니다. 그러나 당신은 벌써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읍디다. 15년이나 그리던 아내와 자식이 곁에 온 줄도 모르고 당신의 몸은 푸르뎅뎅하게 성난 시멘트 방바닥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지요. 나와 수범이는 울지도 못하고 목메인 채로 곧 여관에 나와서 하룻밤을 앉아서 새우고, 그 이튿날 아홉시 되기를 기다려 다시 형무소에 갔읍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고 면회를 거절하겠지요. 물론 비참한 광경을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관리들의 고마운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세상을 아주 떠나려는 당신의 임종을 보지 못하는 모자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읍니까?

정말 당신은 2월 21일 그날 오후 네시 이십분에 영영 가버리셨다구요. 당신의 괴로움과 분함과 설움과 원한을 담은 육체는 2월 22일 오전 열 한시, 남의 나라 좁고 깨끗치 못한 화장터에서 작은 성냥 한 개비로 연기와 재로 변하고 말았읍니다. 

당신이여!
가신 영혼이나마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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