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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시그리드 누네즈, [어떻게 지내요](정소영 옮김), 엘리, 2021(2022 재판)(253쪽) 옮긴이의 말시몬 베유의 말에서 따온 ‘어떻게 지내요’라는 말은 원어인 프랑스어로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이고, 이웃에 대한 관심은 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소설 속 일화들이 진짜 고통받는 삶의 장면이라기보다 연로한 여성 작가의 불평으로 들리기도 한다는 의구심도 있을 수 있다. 문학 작품이라면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식의 착잡함만이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어떤 식으로든 담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내가 누군가의 삶을 지옥..

극한 노동의 응축, 멸치액젓

김창일, [물 만난 해양민속학자의 물고기 인문학], human & books, 2024.(121~ 127쪽)밑반찬은 물론이고 젓갈, 액젓, 분말 등 감칠맛을 내는 데에 빠뜨릴 수 없는 식재료, 우리 식탁에서 멸치의 위상을 넘는 생선이 있을까? 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맛의 주연이다. [자산어보]에서는 멸치를 추어, 멸어라 했다. ‘업신여길 멸’ 자에서 알 수 있듯 변변찮은 물고기로 여겼다. 국이나 젓갈 또는 말려서 각종 양념으로 썼다. 물고기 미끼로 사용했으며 선물용으로는 천한 물고기라고 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한 그물로 만선하는데 어민이 멸치를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으무로 이를 거름으로 사용한다. 건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삼고 회, 구이로 먹고 건조하거나 기름을 짜기도 한다’고 했다. [난..

빛과 실

한강, , 한림원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강연, 2024.12.7. (다음은 한 작가의 강연 전문. 관련 내용과 영상은 2024.12.8 한경닷컴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빛과 실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