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현, “가장 진보적인 운동”, [녹색평론](186호), 2024년 여름호.
건강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까지 높았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건강과 관련한 정보가 온갖 매체를 통해서 멀미가 날 만큼 매일같이 쏟아져 나온다. 건강은 좀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최종 목표가 된 것 같다. 전 세계 건강산업은 규모가 4조억 달러를 훌쩍 넘어가고 이른바 선진국들의 경상의료비는 GDP(국민총생산)의 10% 내외에 이른다. 만약 병소가 아니라 병의 원인으로 이름을 붙인다면 풍요의 질병, 오염의 질병이라고 해야 할 ’전염병‘들이 창궐하고 있다.
황폐할 뿐만 아니라 독을 가득 품고 있는 대지와 공기에 둘러싸여서, 양분이 없는 음식, 가짜 식품(초가공 식품)을 먹고 마시고, 보람을 느끼기는커녕 마음 깊은 곳에서 쓸모없는 일 또는 근본적으로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활동을 밥벌이 삼아 살아가면서 아픈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악할 만한 수치도 현대 세계의 병리적 현실을 정당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나라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1차 진료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고통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병원이 병을 만들어내고 있다. 의원성 질환이 3대 사망 원인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건강관리'가 대단히 수익성이 좋은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거짓 수요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고, 이제 우리는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던 출생, 노화, 죽음조차 제도화된 의료체계에 전면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정상이 무엇이고 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획일적인 기준이 만들어졌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상태는 모조리 질병으로, 즉 의료적 개입을 통해서 교정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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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을 강화하고 전문가의 독점을 배제하고 보통사람들의 자율적 능력과 삶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는 것은 보건분야에만 국한해서 필요한 일은 아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무사히 건너가기 위해서는 농업, 산업, 경제, 교육, 교통 등 산업문명의 전 영역에서 범죄적일 만큼 낭비적인 ‘자본주의적 경제성’ 논리를 깨끗이 물리치고 저에너지 고효율의 시스템을 건설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맥락에서, 공유지를 회복하고 공동체적 문화를 복구하여 자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기후운동이 될 수 있다.
자율성에 기초한 협동적 네트워크야말로 에너지를 가장 적게 소비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일은 우리가 일상을 꾸려가는 구체적인 장소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지역에서는 성취되기 어렵다. 우리의 상상력과 감수성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터전, 생활공간을 넘어선 곳에서는 스스로의 결정과 행위가 장기적으로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상관하지 않거나 내다보지 못할 수 있다. ’공유지의 비극‘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이 내밀하게 알고 있는 장소를 벗어난 곳에서는, 건전하고 충실한 판단을 내리거나 책임 있는 행동을 끈기있게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이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운동은 공허하고 쉽게 좌절될 가능성이 크다. 독일의 언어학자 우베 푀르크센은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현실과 동떨어진 언어를 ’플라스틱 언어‘라고 부른다. 그는 전문가나 기술자, 정치가, 미래학자들이 구체적인 장소와 연결될 수 없는, 실체가 불분명한 언어들을 조합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대중은 혼란에 빠지고,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납작하게 뭉개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기후변화‘나 ’6차 대멸종‘ 같은 용어들은 어떨까. 그 위협적인 내용의 무게에 맞게 변화의 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의료기술의 발달이 일상적, 사회적, 문화적 의인성 질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원리로, 기후운동이 전문화되어가는 만큼 대중은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기후운동의 전문성 역시 근본적으로 환원주의적, 기계론적, 산업적 사고방식과 훈련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악을 악으로 타도할 수는 없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은 현재, 이곳뿐이다. 생태문명은 지구가 유한한 체계라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는 범위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 도래할 수 있을 것 같다.
기후운동은 10년 뒤, 100년 뒤에 지구를 구하겠다는 목표를 버리고, 우리가 저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장소에서 지금 당장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산업문명의 폭력은 끝이 없어서, 더이상 망가질 산하가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오늘에도 이 땅 곳곳에서 자신의 삶터를 지키기 위해서 정부나 거대자본을 상대로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을 힘겹게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들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난다. 지켜야 할 구체적인 장소가 있고, 질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운동, 급진적인 행위는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