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접목의 연쇄

이춘아 2024. 6. 30. 04:29

줌파 라히리,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이승민 옮김), 마음산책, 2023. 


33: 어떤 외국어이든 그 언어를 정복하려는 사람은 두 가지 주요한 문을 열어야 한다. 첫째는 독해력, 둘째는 입말이다. 중간에 놓인 더 작은 문들, 이를테면 구문, 문법, 어휘, 의미의 늬앙스, 발음도 무엇 하나 건너뛸 수 없다. 그것들을 통과하면 비교적 숙달된 수준에 도달한다. 나는 여기서 나아가 감히 글말이라는 제3의 문을 연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독해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외국식 억양, 군데군데 약간의 발음 오류를 논의로 하면, 입말의 문도 비교적 쉽게 열린다. 단연 막강한 상대인 글말의 문은 빠금히 열려 있을 뿐이다. 

36: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두 번째 은유 역시 랄라 로마노에게서 얻었다. 그의 첫 책이 아닌 마지막 책에서, [최후의 일기]라는 표제의 이 책은 로마노가 거의 시력을 잃은 생애 마지막 몇 해의 사유와 메모와 기억이 담긴 유고집이다. 작가는 커다란 흰 종이에 알아보기 힘든 손 글씨로 주석을 달았다. 나는 이런 텍스트가 있다는 것도, 작가가 실명한 사실도 까맣게 몰랐다. 작가가 살았던 밀라노의 자택에서 안토니오리아가 나에게 이 책을 건네주었다. 나는 장서와 그림들에 둘러싸인 로마나의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가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와의 거리가 더욱 좁혀진 것 같았다. 

[최후의 일기]는 언어를 통한 자기표현과 자기 확인의 필연성, 경계를 넘어야 하는 필요성을 강렬하게 증언하는 내밀하고 파편적인 텍스트다. 시력이 제한된 상태에서 로마노의 글쓰기는 오히려 더 정교하고 투명해진다. 절충과 짐작에 기댈지라도 그의 시각은 칼날처럼 빛을 뿜는다. 

[최후의 일기]는 시력의 상실이 부여하는 새로운 관점을 들춰낸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내 이탈리아어의 태생적인 한계에 대해 독자들과 나 자신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런데 로마노가 나를 일깨웠다. 
“실명에 가까운 내 시력= 하나의 관점”

39: 마지막 은유는 2006년에 출간된 엘레나 페란테의 세 번째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읽다가 발견한 단어다. 페란테는 내가 이탈리아로 이주하기 전에 처음 이탈리아어 원서로 읽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당시에는 이탈리아 밖에서 그의 책을 읽거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나는 그의 솔직하고 힘 있는 목소리, 그가 다루는 불편한 주제들, 여성 캐릭터들에 매료되었다. 그의 인상적인 어휘를 흠모했고, 덕분에 내 어휘도 발전하게 되기를 바랐다.  [잃어버린 사랑]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단어 가운데 하나는 ‘접목’을 뜻하는 ‘innesto’였다. 이 단편은 두 딸과 복잡한 갈등 관계에 놓인 엄마가 주인공이다. 그는 한때 딸들을 버리고 떠났다 돌아온 이력이 있다. 딸에게 있는 못마땅한 기질, 딸들과 자기 사이에서 감지되는 유전적인 편차가 이 엄마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페란테는 이렇게 적는다. 

두 딸들에게서 내가 스스로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면들을 확인할 때조차 나는 뭔가 틀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딸들은 그 장점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나의 가장 빼어난 자질이 그 애들의 몸에서는 결국 잘못 접목된, 우스꽝스러운 흉내에 그치고 말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고 창피하기도 했다. 

41: 식물학 용어로서 접목은 번식법의 일종이며, 더 나은 열매나 새로운 품종을 얻어내는 방법이다. 접목은 뭔가 독창적인, 혼종의 것을 낳는다. 발달상의 결함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 다시 말해, 생물종을 더 내성이 강하고 튼튼하게 개량하는 용도로 - 활용되기도 한다. 

접목은 일종의 투입이다. 한 요소를 다른 요소 안에 집어넣는 행위다. 성공의 전제 조건은 작용하는 두 요소 간의 친화성이다. 여기에는 연결, 융합, 결합이 요구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접합되는 것이다. 

접목은 이식이므로, 이동과 절단이 불가피하다. 완벽하게 성공한다면 신묘한 변화로 귀결된다.  심리적이고 정치적이며 창의적인 뉘앙스로 충만한 이 아름다운 단어야말로 나의 이탈리아어 실험을 제대로 나타내준다.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겠다는 나의 결정이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 인생은 접목의 연쇄 안에 있다. 

이민 가정의 자식으로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슬아슬한 지리적 문화적 접목의 결실이다. 애초에 글쓰기를 시작할 때부터 나는 이 주제와 경험, 트라우마를 이야기해왔다. 그것이 내가 세계를 읽는 방식이다. 접목은 나를 설명하고 규정한다.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지금은 나 자신이 한 그루의 접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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