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묘비

이춘아 2024. 10. 28. 21:48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윤석남 작, 2021


(9~10쪽)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 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우듬지가 잘린 단면마다 소금 결정 같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은 검은 나무들과 그 뒤로 엎드린 봉분들 사이를 나는 걸었다. 문득 발을 멈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로 자작자작 물이 밟혔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어느 틈에 발등까지 물이 차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지평선인 줄 알았던 발판의 끝은 바다였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물었다.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 거야?
점점 빠르게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날마다 이렇게 밀물이 들었다 나가고 있었던 건가? 아래쪽 무덤들은 봉분만 남고 뼈들이 쓸려가버린 것 아닌가? 

시간이 없었다. 이미 물에 잠긴 무덤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위쪽에 묻힌 뼈들을 옮겨야 했다. 바다가 더 들어오기 전에, 바로 지금. 하지만 어떻게? 아무도 없는데. 나한텐 삽도 없는데. 이 많은 무덤들을 다 어떻게. 어쩔 줄 모르는 채 검은 나무들 사이를, 어느새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가르며 달렸다. 

(314~316쪽)
머릿속 수천 개 퓨즈들에 일제히 불꽃 튀는 전류가 흘렀다가 하나씩 끊기는 것 같은 과정을 나는 지켜봤어.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나를 동생이나 언니로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을 구하러 온 어른이라고도 믿지 않았고, 더이상 도와달라고도 하지 않았어. 점점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가끔 말한다 해도 단어들이 섬처럼 흩어졌어. 응, 아니, 라는 대답까지 하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는 원하고 청하는 것도 없어졌어. 하지만 내가 까서 준 귤을 받아들면, 평생 새겨진 습관대로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나에게 건네며 가만히 웃었어. 그럴 때면 심장이 벌어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나. 아이를 낳아 기르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생각했던 것도. 

그즈음부터 엄마는 잠을 잤어. 언제 그렇게 나에게 잠재우지 않는 고통을 주었느냐는 듯 하루의 삼분의 이, 나중엔 사분의 삼 이상을 잤어.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낸 마지막 한 달은 거의 종일 잠들어 있었어.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모래펄이 완전히 잠긴 뒤 다시는 바다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어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그러던 어느 새벽에 여기로 왔다. 
너한테 했던 약속이 갑자기 생각나서. 나무들을 심을 수 있다고 말했던 땅을 제대로 보려고. 
안개가 짙게 낀 날이었어. 십 년 사이 더 높게 자란 대나무 숲이 우듬지만 보였는데, 박명이 가시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어둑한 전체 모습이 드러났어. 거기서부터 아버지의 집터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 울타리 대신 동백이 심겨 있고 마당 가운데 낮은 산담을 쌓은 무덤이 있는 집터는 한 곳뿐이었으니까. 풀에 덮인 초석 뒤편으로 펼쳐진 밭에 조릿대가 자라고 있었는데, 아직 남은 안개에 싸여서 마치 한계 없이 번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그게 시작이었어. 
다음날부터 세천리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어. 증언을 남긴 노인이 살았던 바닷가 집에 다녀온 뒤로는, 섬에서 수장된 수천 명의 시신이 해류를 타고 쓰시마섬으로 더내려갔을리라고 추정하는 논문을 읽었어 엄마의 옷장 서랍에서 외삼촌에 관한 자료들을 발견한 건, 다음 차례로 쓰시마섬에 가야 할지, 칠십 년 전 해안에 밀려왔거나 도중에 가라앉은 유해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막막하게 생각하던 즈음이었어.  무거운 배의 키를 돌리듯 그때 방향을 틀었어. 엄마가 모은 자료들의 빈자리에 내가 새로 찾은 것들을 메꿔 넣으며 하루하루를 보냈어. 1960년 당시 엄마가 이 집과 대구와 경산을 오가며 몸을 실었을 배편과 버스, 기차의 경로를 추측하고 시간을 계산하면서는 내가 서서히 미쳐가고 있다고 느꼈어.  낮에는 공방에서 나무를 깎고, 밤이면 안채로 돌아와 구술 증언 자료들을 읽었어. 자료마다 다른 사망자들의 데이터를 대조해 확정했어. 오십 년 봉인 해제된 후 접근 가능해진 미군 기록물들과 당시 언론 보도, 1948년과 1949년에 재판 없이 수감된 제주 수형인 명부와 보도연맹 학살 사이에서 사건들을 복기했어.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