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뒷모습

이춘아 2025. 8. 14. 11:41

김훈, [저만치 혼자서], 문학동네, 2022.

(178~ 182쪽)
마장면에서 단풍 든 숲을 바라보면서 나는 때때로 영자를 생각했는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보니 영자에 대해 아는게 많지 않았다. 영자의 알바는 서너 가지쯤 되었는데, 두어 달에 한 번씩 일이 바뀌었다. 영자는 박리다매형 대형 식당에서 식재료를 분류해서 다듬는 일을 하고 한 시간에 오천원을 받았다. 광개토고시텔 일층에 있는 식당이었다. 내가 점심을 먹으면서 노점상이 철거되는 현장을 본 식당이었다. 그 식당은 김밥류만 이십여 종, 분식류 십오 종, 찌개류 이십여 종의 메뉴로 운영하고 있었다. 기본김밥, 김치김밥, 참치김밥…… 라면, 쫄면, 떡라면, 오뎅라면, 된장라면, 김치라면……, 오징어찌개, 된장찌개, 바지락찌개, 부대찌개, 순두부찌개…… 이런 식이었다. 다들 비슷한 값이었고, 조미료를 베이스로 하기 때문에 맛도 비슷했지만 두어 점씩은 다른 재료가 들어갔다.

이백 석이 넘는 홀이 끼니때마다 구준생들로 가득찼다. 김+라를 주문할 때 시금치김밥을 먹을지 오뎅김밥을 먹을지를 놓고 한참 동안 헤매는 자들도 있었다. 영자는 그 식당에서 시금치, 계란 프라이, 오뎅, 단무지, 오이 같은 식재료들을 다듬어서 김밥을 마는 숙련공들의 손이 닿는 자리에 가지런히 쌓아놓는 일을 했다. 나는 그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알바하는 영자의 뒷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가을에, 영자는 그 일이 너무 힘들어서 알바를 바꾸었다. 영자는 강남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화장실 담당을 해서 한 시간에 육천원을 받았다. 일인분이 최소한 십만원이 넘는 비싼 식당이었다. 상호가 ‘하드리아누스’였다. 영자는 그 식당 화장실 앞에서 지키고 서 있다가 손님이 용무를 마치고 나오면 안으로 들어가서 변기 안에 눌어붙은 배설물을 솔로 닦아내고 물위에 단풍잎을 띄우는 일을 했다. 변기의 물위에 단풍잎이 떠 있어서 화장실에 들어선 손님은 깊은 산속의 맑은 옹달샘 위에 걸터앉아 용변을 볼 수 있었다. 레스토랑 주인은 설비 회사에 부탁해서 물을 내릴 때 파이프가 막히지 않도록 단풍잎을 따로 걸러내는 장치를 고안해냈다고 했다. 노량진에서 강남까지는 전철로 한시간쯤 걸렸지만, 김밥 보조보다는 일이 쉽고 시간당 임금도 천원이 많았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영자는 노량진 사육신 묘지 공원에서 단풍잎을 주워서 강남으로 갔다.

영자는 밥 열두시가 넘어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밤 열두시 소등이라는 합의는 무너졌지만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풍잎을 줍는 영자를 따라서 사육신 묘지 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미리 약속을 해서 간 것이 아니라, 공원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가 우연히 영자를 만나서 따라갔다. 나는 뚝불을 먹고 있었는데 영자는 입구 쪽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사람의 등과 어깨가 뭐가 있기에 뒷모습만으로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인지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기억 속에 시장기처럼 지금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지나간 느낌을 다시 살려내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먹기를 마치고 카운터에서 사천오백원을 계산할 때 영자와 눈이 마주쳤다. 영자는 떡라면 냄비를 기울여서 국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나는 영자가 먹은 떡라면값 이천오백원을 함께 계산했다. 내가 영자의 밥값을 내주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영자는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잘 먹었어. 고마워.
라고 영자는 말했다.

비가 개서 사육신 묘지 언덕의 저녁은 서늘하고 가벼웠다. 연애하는 남녀들이 벤치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벤치에 책가방이 놓여 있는 거로 봐서 다들 구준생인 모양이었다. 땅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비에 젖어 있었다. 영자는 막대기로 나뭇잎을 헤집어서 작고 여린 단풍잎을 찾았다. 아마도 크고 억센 잎은 변기 파이프에 걸릴 수가 있으니까 작고 여린 잎을 골라오라고 하드리아누스 주인이 요구했을 것이었다. 나는 그걸 영자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루 저녁에 단풍잎이 사십 장 정도 필요하지만, 겨울에 길이 얼면 올라오기 어려우니까 미리 모아두는 것이라면서 영자는 쇼핑백 가득히 이파리를 담았다.

사육신들의 봉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어둠이 흙속으로 스몄다.

봉분 위에 풀이 시들어서 봉두난발의 사내들을 묶어놓고 국청의 고문이 진행중인 듯싶었다. 누런 메뚜기 몇 마리가 젖은 풀섶에서 뛰었다. 봉분 앞에는 석 자쯤 되는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석질은 허름했고 장식이 없는 맨돌이었다. 그 묘비에는 다만 성씨지묘, 박씨지묘, 이씨지묘, 유씨지묘라고만 새겨져 있었고, 관향도 생몰연도도 벼슬 이름도 없었다. 성씨를 새긴 글씨는 푸석거리는 석질 위에서 풍문처럼 사위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영자가 묘비들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 지난 시험에 출제됐던 사람들이네.
-그렇구만. 죽으면서 시를 쓴 사람들이네. 바로 옆 동네에 있었군.
- 그런데 왜 이름이 없지?
- 쓸데없으니까 안 썼겠지.

영자와 나는 글자가 사위어가는 묘비를 향해 하나 마나 한 말을 주고받았다.

묘지 언덕을 내려와서 영자는 지하철을 타고 하드리아누스로 갔고, 나는 김유사 국사반의 저녁 강의실로 갔다. 동서남북 노소시벽이 갈려서, 죽고 죽이고 엎어지고 뒤집어지는 과정을 김유사는 설명했고, 여자들은 여전히 머리채를 들어올려서 ‘전설 바다의 밤물결’을 드러냈다.

그날 사육신 묘지 공원에 간 것이 영자와 함께한 단 한 번의 나들이였다. 필기시험을 마친 여름에 영자는 식당에서 내버린 플라스틱 함지박을 주워와서 조롱박을 심었다. 함지박 화분은 일층 식당 쓰레기통 옆에 두었다. 조롱박 넝쿨이 비닐 봉투 끝을 타고 올라와서 이층 내 방 창문 앞에 어린애 손바닥 같은 이파리를 펼쳤다. 밤에는 지하철 전조등 불빛에 이파리들의 그림자가 드러났고 또 사라졌다. 하드리아누스의 단풍잎 화장실은 명품 아이디어로 인터넷에 소개되었고 다른 업소들이 다투어서 흉내냈다. 창문에 매달린 조롱박 열매에 붉은 물이 들 무렵에 9급 발표가 났다. 나는 붙고 영자는 또 떨어져서 동거는 끝났다. 떠날 때, 영자는 조롱박 넝쿨을 걷어서 일층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학원에서 마련한 합격자 축하 회식에서 돌아오다가 일층 쓰레기통에 버려진 조롱박 넝쿨을 보고 영자가 떠났음을 직감했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의 돌봄  (5) 2025.08.25
말년  (7) 2025.08.23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  (11) 2025.08.01
모자 쓴 석불의 미소  (5) 2025.07.25
죽음이 아니라 삶에 가까운 사진을 찍는 것  (5) 2025.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