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훈, [허송세월], 나남, 2024.
(37~39쪽)
의사가 말하기를 늙은이들의 몸에는 보통 대여섯 가지의 만성질환이 자리 잡고 있는데, 여러 병증 사이에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여서 무슨 병인지 진단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병증들이 섞여서 두루뭉수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병증을 분리해서 개념화할 수 없기 때문에 병을 다루기 어렵다는 의사의 고충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병이란 본래 개념이나 언어를 이탈하는 증세이므로 병조차도 늙어야 제대로 깊어지는 것인가 싶었다.
의사가 또 말하기를, 늙은이의 병증은 자연적 노화현상과 구분되지 않아서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늙은이의 병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딱히 병이라고 할 것도 없고 병이 아니라고 할 것도 없다는 말이었는데, 듣기에 편안했다. 늙음은 병듦을 포함하는 종합적 생명현상이다.
생, 로, 병, 사가 본래 각각 독립된 범주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뒤엉켜 동시에 굴러가면서 삶의 기본 풍경을 이루는 것이라고 나는 늘 느끼고 있었는데, 노환에 대한 의사의 의학적 소견도 삶에 대한 나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져서 시간에 백내장이 낀 것처럼 사는 것도 뿌옇고 죽는 것도 뿌옇다.
슬플 때는 웃음이 나오고 기쁠 때는 눈물이 나오는데, 웃음이나 눈물이나 물량이 너무 적어 나오는 시늉만 한다. 안구건조증이 오면 눈이 쓰라리고 눈물이 흐르는데, 눈물이 흘러도 안구는 건조하다. 병원에 가면 눈물 흐르는 눈에 또 인공눈물을 넣으라고 한다. 눈물에 약물이 합쳐져서 눈물은 넘치는데, 젖은 눈이 메마르다. 어째서 이런지는 나도 모르고 의사도 모른다.
밥을 먹을 때는 입안이 메말라서 밥알이 목에 걸리는데, 잠을 자거나 하품을 할 때는 침이 흘러서 입 밖으로 나온다.
술마시고 나면 술이 지겨워서 빨리 깨고 싶고, 술 깨면 세상이 너무 환해서 마시고 싶으니, 술이란 무엇인지 술을 마셔도 알 수 없고 안 마셔도 알 수 없는데, 사람들아 어쩌자고 자꾸 마시는가.
말을 하려다가도 말이 뜻을 저버릴 것 같아서 미덥지 못하고 이 귀머거리들의 세상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머뭇 거리는 사이에 말들은 흩어져서 할 말이 없어진다. 글을 쓰다가도 이런 쓰나 마나 한 걸 뭐 하러 쓰는가 싶어서 그만둔다.
늙으니까 혼자서 웃을 수밖에 없고 혼자서 울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은데, 웃음과 울음의 경계도 무너져서 뿌옇다. 웃음이나 울음이나 별 차이 없는데, 크게 나오지는 않고 바람만 픽 나온다.
기쁨, 슬픔, 외로움, 그리움, 사랑, 행복 같은 마음의 침전물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로되, 이 물컹거리고 들척지근한 단어들을 차마 연필로 포획할 수가 없어서 글로 옮겨 남들에게 들이밀지 못한다.
단어들도 멀어져 간다. 믿고 쓰던 단어에서 실체가 빠져나가서 단어들은 쭉정이가 되어 바람에 불려 간다. 단어의 껍데기들이 눈보라처럼 바람에 쓸려 가는 풍경은 뿌옇다. 부릴 수 있는 단어는 점점 적어져서 이제는 한 줌뿐인데, 나는 이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가난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주어와 술어를 논리적으로 말쑥하게 연결해 놓았다고 해서 문장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주어와 술어 사이의 거리는 불화로 긴장되어 있다. 이 아득한 거리가 보이면, 늙은 것이다. 이 사이를 삶의 전압으로 채워 넣지 않고 말을 징검다리 삼아 다른 말로 건너가려다가는 허당에 빠진다. 이 허당은 깊어서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허당에 자주 빠지는 자는 허당의 깊이를 모른다. 말은 고해를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가 휑하니 비면 문장은 들떠서 촐싹거리다가 징검다리와 함께 무너진다. 쭉정이들은 마땅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므로, 이 무너짐은 애석하지 않다. 말들아 잘 가라.
200쪽. 수제비와 비빔밥
물이 반죽속에서 수행하는 작용과 들기름이 비빔밥 속에서 수행하는 작용은 크게 다르다. 물은 재료의 입자들을 엉기게 하지만, 들기름은 재료와 재료 사이의 거리를 존중하고 그 사이를 연결함으로써 모든 살아 있는 개별성의 조화로운 종합으로서 새로운 맛의 장르를 이룬다. 이것은 한바탕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 맛이다. 그러므로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는 손길과 비빔밥을 비비는 손길은 그 힘과 질감과 작동방식이 같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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