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한밭춘추 기고 8 (2011년 10월 21일자)
확신의 밑줄을 긋다 이춘아 한밭문화마당 대표
몇 해 전 도사님으로 모시고 있었던 분께서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라고 물음을 던지셨다.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근면함과 성실함만이 세계화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 하셨다. 근면과 성실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몇 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듯하였고 정신이 맑아지는 듯 했다. ‘문화적 감수성’과 ‘창조적 상상력’이라는 신선한 단어에 사로잡혀있던 당시였고 그 매혹적인 단어를 내 삶속에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가가 최종 목표였던 시절이었다. 감수성과 상상력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복고풍의 ‘근면과 성실’은 얼마나 상쾌했던지.
십오 년 전 문화에 길이 있는 것 같아 발을 들여놓았던 곳이 한국문화복지협의회였다. 1996년 당시 ‘문화복지’라는 용어가 문화정책으로 입안되고 이를 실천하기위한 단체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소위 문화세례를 받은 셈인데, 일하는 동안 문화봉사자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교육을 하였다. 교육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문화봉사자’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내가 찾던 바로 그것인 것 같아 찾아왔다 하였다. 만족도가 최고였던 교육이었다.
문화복지, 문화봉사 라는 단어가 이제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복지에 대한 오해가 여전히 남아있다. 문화소외층, 문화취약계층에 대한 한정된 복지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1996년도에 문화복지라는 정책이 만들어지고 얼마되지 않아 IMF가 터지면서 문화복지와 관련한 정책은 모두 문화소외층에 집중되었고,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게 운용되고 있다.
한국문화복지협의회를 창립한 이중한 회장님이 [국민 창의력을 위한 문화봉사]라는 책을 2003년 발간하였다. 그 책에는 그동안 내가 문화세례를 받았던 내용이 담겨있었고, 읽으면서 다시한번 확신의 밑줄을 그었다. 새로운 문화학습을 위해 문화인력이 결집되는 문화복지운동은 결국 삶의 경쟁력 획득의 운동이라는 것. 문화의 다양성과 예술창조 장르간의 구분을 넘어서는 통합력과 문화적 창조력은 ‘국민 모두를 위한 문화정책’이어야한다는 것이다.
국민 모두를 위한 문화창의력 증진으로서 문화복지, 문화봉사가 이제 다시 방점이 찍히고 있다. 나도 남들처럼 배움의 욕구로서 문화시설을 찾던 사람들이 스스로의 문화적 향유를 위해 동아리를 만들고 봉사할 거리를 찾아가고 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인형극을 가르치고 있는 강사를 만났다. 방과후 돌봄 교실에서, 마을도서관에서 책읽어주는 봉사자를 만났다. 언뜻 보아도 할머니 줄에 들어선 나이이지만 속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 차있다. 삶의 ‘터닝 포인트’를 찾았다 하였다. 문화의 힘에 확신의 밑줄을 긋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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