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노인전' (2)

박지원,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홍기문 옮김), 보리, 2004.

박지원(1737~1805):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며 학문을 닦았다. 홍국영의 세도정치를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들어가 살며, ‘연암’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 쉰 살 넘어 정조의 부름을 받고 선공감역, 안의현감 등을 지냈다. 홍대용과 깊이 사귀었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들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문학, 철학, 사회 사상, 행정, 과학, 음악 따위 두루 학식이 깊어 뛰어난 글을 많이 써 당대 사람들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양반전’ ‘범의 꾸중’을 비롯한 단편 소설 십여 편, 시 사십여 수, 농업과 토지 문제를 개혁하려는 사상을 쓴 ‘과농소초’, 여러 가지 문학론과 사회 개혁 사상, 편지글들이 [열하일기]와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민 노인전' (2)


민 노인은 무슨 말을 묻던지 이리저리 끌어다 붙이건만 이치에 그럴듯하고 또 은근히 풍자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대개 그는 훌륭한 변론가였다. 다른 손들이 아무리 물어야 막히지는 않고 더 물을 것은 없으니까 나중에는 분이 올라서 말하였다. 

“그래 노인장이 무슨 무서운 것을 보셨습니까?”

그는 한참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소리를 뻑 질렀다. 

“무섭다, 무섭다 해도 제 자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네. 제 바른 눈은 용이 되고 왼눈은 호랑이가 되고 혓바닥 밑에는 독기를 감춰 두었고 팔목을 굽혀서는 활이 되네. 처음 생각은 천진스러운 젖먹이 같다가도 조금만 비뚤어지면 오랑캐로 되고 마는 것일세. 만약 경계하지 않으면 제가 저를 씹어먹고 긁어 먹고 찔러 죽이고 쳐죽일 것일세. 그래서 성인이 제 욕심을 절제해서 예절을 따르게 하고 간사한 생각을 막아서 진실한 마음으로 일관하게끔 하는 등 제 자신을 제일 무서워한 것일세.”


이렇게 수십 가지를 질문하여도 모두 턱턱 답변을 해 나가서 말이 언제나 물려 본 적이 없었다. 자기가 자기를 찬양도 하고 칭찬도 하다가 또 남들을 조롱도 하고 빈정거리기도 하는데 남들은 모두 허리를 분지르건만 자신은 얼굴빛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황해도에서 황충이 일어났기 때문에 관가에서 백성을 풀어 잡고 있다고 이야기하니 민 노인이 물었다. 

“황충은 잡아서 무얼 하나?”

그가 말하였다. 

“그게 벌레랍니다. 첫잠 자는 누에보다 조금 작으며 빛이 알룩알룩하고 털이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것은 며루라고 하고, 곡식에 붙은 건 계심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나 곡식의 씨를 지우기 때문에 잡아서 묻어야 합니다.”

민 노인이 말하였다. 

“그런 조그마한 벌레는 걱정할 것 없네. 내가 보건대 종로 거리에 길이 메게 다니는 것이 모두 황충이란 말일세. 키가 전부 일곱 자에, 머리는 새까맣고, 눈은 반짝이고, 아가리가 커서 주먹이 들어가는 데다, 입으로는 연해 웅절거리고, 몸은 언제나 구부숭한 것이 줄지어 다니네. 곡식을 씨 지우는 데는 이 무리보다 더 심한 것이 없지만 큰 바가지가 없어서 내가 잡아 담지도 못하네그려.”

옆에 앉았던 사람은 참말 그런 벌레가 있는 줄 알고 모두 무서워들 하였다. 

이듬해 민 노인은 돌아갔다. 그가 비록 익살스럽고 기걸한 풍이 있었으나 성질은 깨끗하고 굳어 좋은 일을 행하려고 힘썼으며, 특히 [주역]에 밝고 [노자]의 말을 좋아했는데 대개 책이란 책은 보지 못한 것이 없다고 한다. 

아들 둘이 모두 무과 과거 시험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은 얻지 못하고 있다. 금년으로 들어서면서 내 병은 더해지고 있으나 민 노인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그래서 나와 더불어 수수께끼, 우스갯 소리, 재담, 풍자를 한 것들을 적어서 ‘민 노인전’을 쓴다. 때는 정축년(1757) 가을이다. 

내가 그의 평생 사적을 추모해서 글을 지었다. 

“아하! 민 노인은 괴상도 하고 기이하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노엽기도 하고 또는 얄밉기도 하다. 바람벽에 그린 까마귀가 필경 매로는 되지 못하고 말았다.

대개 민 노인은 뜻 있는 선비였건만 늙어 죽도록 아무런 일도 해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를 위해 전을 쓴다.

아하! 이로써 그의 이름이 아주 없어져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