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1737~1805):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며 학문을 닦았다. 홍국영의 세도정치를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들어가 살며, ‘연암’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 쉰 살 넘어 정조의 부름을 받고 선공감역, 안의현감 들을 지냈다. 홍대용과 깊이 사귀었고,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들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문학, 철학, 사회 사상, 행정, 과학, 음악 따위 두루 학식이 깊어 뛰어난 글을 많이 써 당대 사람들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양반전’ ‘범의 꾸중’을 비롯한 단편 소설 십여 편, 시 사십여 수, 농업과 토지 문제를 개혁하려는 사상을 쓴 ‘과농소초’, 여러 가지 문학론과 사회 개혁 사상, 편지글들이 [열하일기]와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말거간 전' (1)
송욱, 조탑타, 장덕홍이 광통교 위에 서서 벗 사귀는 묘리를 의논하는데, 송욱이 말하기를,
“너만 하면 벗을 사귀는 묘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만하다. 내가 금방 한 가지만을 일러 주었는데 너는 두 가지를 알아 내는구나. 온 세상에서 와하고 몰려드는 것이 세력이요, 머리를 맞대고 쑤군거리는 것이 명예와 잇속이다. 술잔이 언제 입과 약속을 했을까마는 팔이 안으로 굽어드는 것이 필연한 형세인 것이다. 사람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명예가 아니냐? 대체 좋은 벼슬에는 잇속이 붙는 법이다. 그러나 덤벼드는 사람이 많고 보면 세력이 분산되고, 같이 쑤군거리는 사람이 여럿이고 보면 명예나 잇속도 제 차례에 돌아갈 것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점잖은 사람들이 이 세 종류에 대해서 말을 잘 하지 않은 지 오래다. 나도 슬며시 변죽만을 울린 것인데 너는 알아맞히는구나.
네가 남을 사귈 때 지나간 일일랑 칭찬하지 말라. 이미 지나간 일은 아무리 칭찬하여야 보람이 나지 않을 것이다. 또 남이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일랑 일깨우지 말라. 그가 모처럼 하려고 하다가도 싱거워질 것이다. 여러 사람이 가득 앉은 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제일이라고 내세우지 말라. 한 사람을 제일이라고 하면 그 위에는 다시 없는 것이니 온 좌석이 고만 맥이 빠져 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사귀는 데는 묘리가 있다. 누구를 칭찬하려고 하거든 겉으로 책망하는 말투를 써야만 하고, 누구에게 호의를 보이려고 하거든 성난 듯이 해야 하고, 누구와 친하려고 하거든 박은 듯이 서서 들여다보다가 부끄러운 듯이 몸을 돌이켜야 하고, 남들이 나를 믿게끔 하려고 하거든 먼저 의심을 사게 만들어 가지고 기다려야만 한다. 대체 의기가 있는 선비는 슬픔이 많고, 미인은 눈물이 많은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도 울기를 잘해서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것이다. 대개 이상의 다섯 가지 법은 점잖은 사람의 조그마한 방편이라고 하겠지만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는 툭 터진 큰 길이란 말이다.”
하니, 탑타가 덕홍에게 물었다.
“대체 송 선생의 말씀은 뜻이 깊어서 수수깨끼나 마찬가집니다. 나는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덕홍이 대답하였다.
“네가 어떻게 알아듣겠는냐? 대체 그가 잘한 일을 가지고 책망을 하면 그보다 더한 칭찬은 없다. 대체 사랑에서 노염이 생기고 나무라는 데서 정이 붙는 것이라. 한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불평이 생겨 때때로 언성이 높아진다. 대체 친한 사이일수록 틀리기 쉬운 것이니 친한 보람이 어디 있으며, 믿는 사이에도 오히려 의심이 있으니 믿는 보람이 어디 있을 것이냐?
술판이 한고비를 넘고 밤이 이슥해지면서 사람들은 죄다 졸고 있을 때 말없이 바라보다가 가뜩이나 술이 취한 사람의 슬픈 심회를 자아내 준다면 그의 속이 뭉클해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벗을 사귀는 데는 서로 알아주는 이상 없고, 즐겁기는 서로 뜻이 맞는 이상 없으며, 편협한 사람의 꽁한 마음을 푸는 데나 시기쟁이의 원망을 떨어 버리는 데는 울음을 우는 이상 더 바른 길이 없는 것이다. 내가 남과 사귀면서 울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건만 울어도 눈물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라 안을 돌아다닌 지 서른한 해가 되도록 벗 하나가 없다.”
탑타가 말하기를,
“그러면 충성된 마음으로 친구를 대하고 의리로 벗을 사귀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덕홍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꾸짖었다.
“더럽다, 더러워. 네가 그걸 다 말이라고 하고 있느냐? 너 좀 들어 보아라. 대체 가난한 것들은 바라는 속이 많기 때문에 의리를 사모하는 마음이 끝이 없는 것이다. 아득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오히려 낟알이 비처럼 퍼붓기를 기다리고, 남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목고개를 석 자쯤이나 뽑아 올리는 것이다. 재산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인색하다는 지목도 싫어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그래야만 남들이 자기에게 바라지를 않게 되는 것이다.
대체 천한 것들은 애초에 아낄 것이 없기 때문에 충성스러워서 어려운 노릇도 사양치 않고 덤벼들게 된다. 왜 그런고 하니 옷을 입은 채로 물을 건너는 사람이 있다면 헌 옷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수레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신 위에 덧신을 껴신고도 오히려 흙이 묻을까 조심하는데, 신바닥도 이렇게 아끼거든 더군다나 제 몸이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충성이라거니 의리라거니 그런 것은 가난하고 천한 것들이 할 노릇이지 부자나 귀인들에게는 말을 건네 볼 것도 못 된다.”
탑타가 슬픈 낯빛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차라리 이 세상에서 벗을 얻지 못할망정 점잖은 분네와 사귈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갓을 부수고 옷을 찢고 때묻은 얼굴과 헙수룩한 머리에 새끼로 허리를 동여매고 노래를 부르면서 길거리로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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