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아리에 바르디와의 첫 레슨

이춘아 2020. 8. 23. 06:18

손열음,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 중앙북스, 2015.

‘아리에 바르디와의 첫 레슨’


누군가 나에게 음악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기억이 나는 시점부터 줄곧 음악만 해왔으니, 기억에 남는 여러 충격적인 경험도 실은 수없이 많다. 연주 중 저지른 충격적인 실수, 만족스러운 연주 후의 충격적인 쾌감, 또는 무심코 찾아간 음악회에서 받은 충격적인 감동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번에 그날을 떠올리겠다. 2004년 8월, 그의 명성을 듣고 수소문해 찾아간 독일의 작은 마을, 고슬라의 한 여름 음악캠프. 그곳에서 있었던 내 스승 아리에 바르디와의 첫 레슨 말이다. 

“나는 위에 가서 들을게, 그래도 되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 그분이 이윽고 성큼성큼, 2층 발코니로 가서 앉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쇼팽의 24개의 전주곡 Op.28을 1번부터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떨려서일까, 아니면 정식 무대가 아니라 흥이 안 나서일까, 연주가 미치도록 안 풀리는 것이었다. 손은 손대로 안 돌아가는 것 같고, 머리도 안 돌아가고, 치면 칠수록 나아질 기미는커녕 더욱 나빠지는 것만 같아 갈수록 의욕을 상실했다. 꾸역꾸역 13번까지 다 연주했을 때였다. “고마워!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16번을 연주해 줄래?”

순간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아! 아직 열 곡도 더 남았는데. 더 이상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뜻일까? 그런데 왜 하필 16번을!’ 16번은 짧지만 오른손의 속주와 왼손의 도약이 합쳐져 쇼팽의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어렵기로 유명한 곡이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연주를 시작했다. 우당탕탕... 어떻게 쳤는지도 모를 1분이 휙 지나갔다. 숨을 죽이고 2층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분은 조용히 악보를 덮으시고는, 박수를 쳐주었다. 그것도 한참을.... 그러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내 옆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럼 우리 레슨을 시작해 볼까?” 그분이 펼친 곡은 전주곡 13번이었다. “Lento(아주 느리게), 쇼팽이 lento라고 적은 또 다른 곡들은 뭐가 있지?”

단연코 한 곡도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에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주제였다. 아무 대답도 못하는 나를 보고 그분은 쇼팽의 이런저런 다른 ‘렌토’를 쳐 주었다. 다음 질문. “그럼 F샤프(올림 바)장조로 된 쇼팽의 다른 곡은 생각나는 것이 있니?” 또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건 그렇게까지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한참 후에야 겨우 답이 생각났다. “녹턴 Op.15 No.2....” 내 대답을 듣고 눈이 두 배로 커진 그분. “그렇지! 그리고 이것도 있지?” 하며 옆 피아노에 앉아 쳐 주신 곡은 뱃노래 Op.60.

“그렇다면... 이 작품들의 공통점으로 보아 쇼팽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F샤프장조의 성격을 정의할 수 있겠니?” “글쎄... 잔잔한 것이오?” “그래, 그렇지! 또, 방향성이 크다는 것도 들 수 있겠지?” “음... 그렇겠네요.”

그날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보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여기엔 매우 이상한 슬러(이음줄)가 있네? 두 마디, 두 마디, 또 두 마디에 사용했다가 여기 딱 한 마디에만 안 썼지 왜 일까?” 매일 봐 왔던 악보인데... 맹세코 생전 처음 발견하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신기한 것을 이렇게까지 몰랐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물론 나도 왠지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이 사실을 통해 최소한 이 부분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 그러곤, 독특한 그 슬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여러 가지 연주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고작 첫 여덟마디를 가지고, 40분도 넘게....

마치 세계를 뽑아내는 듯한 작업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자, 이제 그만 다음으로 넘어갈까? 여기 piu(조금) lento는 무슨 뜻일까?” “조금 더 느리게...” “ 물론 그렇지. 그럼 얼마나 더 느리게 연주하면 될까?” 어느 정도로 느려야 하느냐니, 그것은 당연 연주자의 마음인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조금 더 느리게 연주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좋은 연주자라면, 쇼팽이 무엇을 의도한 건지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 봐야지 않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내 말이 그거였다. 어떻게?

“자, 여기를 봐. 왼손은 계속 8분음표를 연주하고 있지만 오른손은 앞과 달리 점2분음표가 아니라 2분음표를 연주하네? 그렇다면 쇼팽은 무의식적으로 최소단위 박자를 앞부분은 두 개, 뒷부분은 세 개로 나눈 게 아닐까? 그렇다면 간단하겠다! 같은 박을 유지하되 앞은 세 개씩, 뒤는 두 개씩 끼워 맞추면, 박자의 통일감이 이어지면서도 확실히 다른 두 개의 박자가 생성되겠지?”

내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음악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제일 놀라웠지만 그만큼이나 또한 놀라웠던 것은, 작곡가의 의도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이 순수한 열정이었다. 그야말로 실로 태어나서 처음 본 그 무엇이었다. 

“물론 내가 그의 의도를 다 알 순 없을거야. 내 분석과 추측 역시 다 맞지 않을 수도 있고. 하지만 우리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쇼팽이 하늘에서라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럼 오늘 레슨 끝. 엄청난 재주를 가진 네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냈어. 와 줘서 고마워!”

내 음악 인생은 그날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이후로부터는 때때로 그에게 물려받은 순수한 열정으로 며칠을 지새우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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