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박이소(1957~2004) 작가의 본명은 박철호다 뉴욕에서 공부하고 작업하던 때에는 ‘박모’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했다. 박 ‘아무개’를 뜻하는 ‘모’라는 이름에도, ‘다른 곳’을 의미하는‘이소’라는 이름에도, 작가의 고민과 세상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다.
박이소는 작업의 주제로, 주변부로서의 한국인의 정체성과 탈식민주의를 다룬다. 1984년 그는 사흘간 단식한 후에 무쇠 밭솥을 목에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뉴욕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퍼포먼스를 했다. 천형처럼 목을 죄어 당기는 밭솥은 작가에게 깊숙이 새겨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었다. 이 작업은 바이올린을 끈으로 묶어 끌고 다녔던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두 작업이 서구 미술계에 갖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백남준의 작업은 미술의 실험적 형식에 관한 것으로, 서구 미술계와 발걸음을 나란히 딛는 세련되고 신선한 것이었다면, 박이소의 밭솥 퍼포먼스는 서구 중심의 미술계를 주변국인 한국의 작가로서 자신만의 속도와 보폭으로 건너가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투박하고 미미하며 느릴지라도 묵묵히 걸어가겠다는 작가의 단단한 선언이다.
<드넓은 세상>(2003)은 들어본 적도 없고, 그래서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는 세계 곳곳의 지명들을 작가가 손글씨로 캔버스에 쓴 작업이다. 내 친구들이 알지 못했던 한국의 위치처럼, 약하고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던 곳들이다. 이 작업에서 박이소가 바라보는 곳은 뉴욕, 베를린, 런던 같은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나고 소외된 세상이다. 삐뚤고 흐릿하게 쓰인 손글씨 위로 글씨보다 작게 인쇄된 지명들이 가늘고 작은 핀으로 살짝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캔버스 앞에 세워진 약한 조명들로 인해 인쇄된 이름들은 캔버스에 약간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모든 표현 방식과 설치 방법이 미미하고 연약한데, 이것은 소수와 주변의 속성과 일치한다. 조용하지만 따뜻하다.
박이소는 2001년 대안공간 풀에서 열렸던 전시에서 공사장에서나 쓰는 투박한 실외 조명기들을 각목에 얼기설기 덧대어 전시장 한쪽 구석을 눈부시게 비추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의 제목을 확인하던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전시장 한켠에 작게 쓰여 있던 제목은 자그마치 ‘당신의 밝은 미래’였다. 연약한 시각적 구성으로 표현된, 허름하고, 흔하며, 낮고, 구석진 곳들에 대한 작가의 배려가 고맙고 울컥했다.
작고 사소한 존재들에 대한 박이소의 관심은 다정한 배려와 애정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작고 연한 것들이 전체를 울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먹으로 풀을 그리고 ‘그냥 풀’이라고 쓴 작업(<그냥 풀> (1988))에서는 한낱 풀이 주인공이 된다. 비슷한 형식의 그림 <잡초도 자란다>(1988)에서는 잡초가 거센 바람을 견디고 크게 자라기 바라는 작가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이 자라서 중심의 질서를 흔들기 원하는 작가의 기대가 담겨 있다. 그래서 별을 그려도 하나를 더 그린다.(<북두팔성>(1997), <팔방미인>(2001)) 일곱 개의 별만으로 북두칠성 별자리가 완성되고 나면, 별이 되고 싶은 주변은, 박이소 작가는, 나는, 우리는, 한국은 빛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 테니까. 박이소의 남은 별 하나는 그렇게 온전한 별자리 시스템을 흐트러뜨린다.
그는 80년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소수에 속하거나 이와 연관된 관심사를 작품에 반영하는 작가들’과 ‘분쟁 지역 국가나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최근에 이민 온 작가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소개하는 ‘마이너 인저리 Minor Injury’라는 미술 공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마이너 인저리는 ‘경미한 상처’를 의미하는데, 작을지언정 뉴욕 주류 미술계에 따끔하고 욱신거리는 유의미한 통증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가 드러난다. 중심과 주변의 지형을 다시 그리기 원했던 작가의 태도가 일관적이다.
빌리 조엘의 노래 <어니스티 Honesty>를 박이소가 한국어로 번역하여 직접 부른 작품이 있다. 작품 제목은 ‘정직성 2’이다.
따스함을 찾기는 어렵지 않아
그냥 사랑하며 살면 돼
진실을 찾는다면 그건 힘든 일이야
너무나 찾기 힘든 바로 그것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더러운 세상에서
HONESTY 너무 듣기 힘든 말 너에게 듣고픈 그 말
<어니스티>를 한국어로 들으니 정말 정직하게 들리고, 박이소의 작고 떨리는 목소리는 더욱 진심으로 와 닿는다. 박이소는 강하고 크며, 화려한 중심이 아닌, 연약하고 작으며, 소소한 주변으로서의 우리를 노래한다. 그리고 그 주변이 스스로의 언어로 나름의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따뜻하고, 정직하고, 다정하게 살면 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미국과 유럽의 친구들이 세계지도에 그려 넣지도 못하는 나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릴 수 있는 다른 걸음걸이와 부드러운 속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중심을 한 군데로 고정하기에는 분명히 세상은 너무나 ‘드넙고’, ‘그냥 풀’도 ‘잡초’도 자란다. 우리의 미래가 박이소 작가의 여덟 번째 별처럼 빛났으며 좋겠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꽃은 언젠가 핀다 (0) | 2020.09.13 |
---|---|
이상한 책 이상한 잡지 이상한 사람 (0) | 2020.09.12 |
그 어떤 똑똑한 생각보다 훨씬 위로가 될 때 (0) | 2020.09.05 |
'음악이란' (0) | 2020.08.30 |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0) | 2020.08.29 |